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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r 20.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13회

손에서 새는 떠나가고

13


말은 엎어진 컵 속의 물이 아니다. 차라리 물이라면 마른 수건으로 깨끗하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말은 손에서 놓친 새와 같다. 떠나간 새는 어찌할 수 없다. 소년은 새를 잡을 총도 없었고 잡을 수도 없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소년의 눈앞에는 유독 새들이 많이 보였으나 새는 그저 새일뿐 더 이상 통제의 대상이 아니었다. 소년은 노인에게 건넨 말이 신경 쓰여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 걸음씩 발을 내딛을 때마다 어떤 박자가 포착되면서 소년의 말은 시의 말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생각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니 자유로운 창공에 닿는 듯했다. 육체라면  막다른 곳이었을 것이다. 다음 주 수요일 낭송 모임에 가져갈 시가 느닷없이 떠올라서 내심 편안해졌다.

A의 고민 끝에 B의 고민이 해결되는 건 소년에게 처음 경험한 일은 아니었기에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고민들은 서로 보이지 않게 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질문은 다르나 풀이과정이 같은 시험문제 같은...


소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길에서 떠올린 시를 검색했다. 다섯 편의 동일한 시를 찾아 비교하는 건 소년의 오랜 습관이었다. 교차점검은 그나마 오류를 솎아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모두가 다를 때에는 서점에 가서 직접 확인하고 수첩에 적어왔다. 다행히 이 시는 한 곳에서 맞츰법이 틀리게 표기된 것을 제외한 네 곳이 일치했다.

시간은 저녁을 지나고 있으나 여전히 방안의 등을 켜지 않아도 글쓰기가 가능했다. 프린터로 출력하지 않고 소년은 시를 옮겨 적었다. 이 과정은 더디지만 1차 초벌 과정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소년이 언젠가 친구에게 말한 걸 빌리자면, 소리 내기 전에 몸에 담고 새기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한 자 한 자 붓글씨를 쓰듯 정성을 들여 쓰는 모습은 과거를 보는 선비와 다를 바 없었다. 행마다 시인의 마음과 시선을 가지고 공감하려는 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쓰는 속도를 최대한 느리게 느리게 써내려 갔다. 그사이 소년은 이미 손에서 떠나간 새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소년의 손아귀에는 새가 아닌 펜이 꽉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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