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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r 21.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14회

등롱초가 보이는 자화상

14



집에 도착하자 예닐곱 개의 우편물이 책상에 놓여있었다. 의자에 앉아 그중 유독 화려하고 커다란 카드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모십니다


귀하를 시낭송 초청 강연에

대표 강연자로 정중하게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


노인은 카드 밑에 적힌 세부일정과 조건들을 읽지도 않고 접어버렸다. 정중하게 의사를 전하려면 활자보다는 음성으로 전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귀국 후 당분간은 외부 일정을 잡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였다.

나머지도 행사의 자리를 빛내달라는 청탁의 우편물일 것이라 예단하고 몸을 틀어 벽에 걸린 그림을 쳐다보았다. 언젠가 동묘역 근처 벼룩시장에서 티셔츠 한 장 값도 안 되는 금액을 지불하고 구입한 모작이었다. 어릴 적 열이 나면 어머니가 손수 캐서 달여주신 땅꽈리가 그려진 것이 반가워 냉큼 집어 든 그림이었다. 지금 보니 배경의 등롱초보다 비스듬히 정면을 응시하는 사내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젊음의 기운을 주체하지 못해 세상에 강렬한 몸부림을 치는 사내가 더 분명하게 보였다. 백 년이나 지난 오스트리아에서 요절한 낯선 화가의 자화상에서 한 달 남짓 만난 소년의 얼굴을 떠올린 것이 놀라웠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몸은 찌뿌둥하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여유가 있었다. 밀린 신문들을 꼼꼼히 읽어본다던가 방 두 면을 차지하는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골라 읽고 사색하는 일도 비 오는 날에 주로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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