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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r 23.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16회

기시감에서 현시감으로

16


-약도를 첨부하니 이곳에서 보세.

약속시간 한 시간 전, K궁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노인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소년은 여러 궁금증이 일어났지만 짧게 답하고 바뀐 장소에 근접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지하철로 발길을 재촉했다. 한 번의 환승을 하고 도착해서 도보로 십 분을 걷자 약도 속 집이 보였다.


-어서 오게. 오후에 집을 나서다 문제가 생겨 꼼짝도 못 하게 되었네.

노인의 한쪽 발목에 압박붕대가 감겨있었다. 뜻하지 않게 약속이 변경되어 노인의 집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처음인 상황인데도 소년은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본 장면 같은데, 아무리 떠올려도 떠오르지 않았다. 소년에게 시를 낭송한다는 것이 그랬다. 기시감 같은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느낀 적이 있다. 데자뷔. 우리는 눈을 통해 엄청난 정보를 받아들인다. 이를 뇌는 효율적으로 저장하기 위해 간략하게 기억하는데 비슷한 상황을 보게 되면 뇌는 비슷하게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본'이라는 뜻을 가진 데자뷔는 기억의 문제라기보다 시각의 문제다. 보는 것들의 총합이 보는 것을 돕기도 하지만 방해도 하는 것이 아닐까. 시를 드러내기 위해 하는 낭송이 시를 오히려 감추는 행위가 되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소년은 노인을 보자마자 한꺼번에 많은 질문이 뒤섞여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자네는 시낭송을 왜 하는가?

낭송을 어떻게 하는지만 고민해온 소년은 어리둥절했다. 좀 더 나은 방법을 얻으려 낭송 모임에도 참석한 소년이었다. 주저하는 사이 노인은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덧붙였다.

-그렇다면 자네는 시낭송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소년은 턱을 두어 차례 쓰다듬다가 두 손을 모아 쥐었다. 낭송 자체에만 집중하기도 힘들었기에 그것 너머의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노인의 인중만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곳에 온 적이 있나?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오지 못했나? 약도 한 장이면 이렇게 쉽게 올 수 있는데. 그건 자네가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던 때문이지 방법을 몰라서 오지 못한 건 아니지 않나.

시낭송도 그렇다네. 방법을 구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이유를 가져야 하네.

소년은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 한적한 오전의 오솔길을 걷는 듯 가슴이 트이고 상쾌해져 심호흡으로 이 공기를 온몸으로 받고 싶어졌다.

-다음으로 시낭송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네. 바로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나 이 생각은 멈추지 않아야 하네. 시를 쓰는 시인의 가치와 그것을 낭송하는 낭송가의 가치는 사뭇 다르다네.

노인은 탁자 왼편으로 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덜 찬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노인은 다짐한 듯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이곳도 알게 되었으니 다음 주부터는 여기로 오게.

자네에게 해줄 말들이 있을 것 같아. 기대는 말게.

나는 자네에게 기술 따위의 말하지 않을 것이네. 물론 그런 것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소년은 노인의 전에 보여준 적 없는 엄격한 투의 말들이 언제인가 소녀로부터 들은 고백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이건 기시감이 아닌 현시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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