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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r 24.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17회

사랑해야만 믿게 되는 것들

17



소년이 소녀를 처음 만난 건 거리공연을 시작한 지 불과 2주가 지난 어느 겨울이었다. 새벽부터 진눈깨비가 내리더니 날이 밝자 점점 눈발이 거세져 하루 종일 눈이 내렸던 날이었다. 컬래버레이션으로 공연하기로 한 통기타 인디 가수의 불참 의사를 이불속에서 전해받은 소년은 옅은 한숨을 쉬며 휴대전화를 닫는다. 준비할 장비는 줄어들지만 준비해야 할 멘트와 시는 늘어난다. 공연할 장소도 노천에서 지붕이 드리워진 공간으로 이동해야 한다. 언제나 버스킹 공연은 변수가 잦았다. 공연을 하다가도 소나기가 내리면 멈추어야 했고, 낮술에 취한 관객이 난입하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노래를 부르는 것과 달리 감정이나 감성이 목소리에 섬세하게 묻어야 하기에 배경음악의 선택이나 음질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낭송만으로는 단조로울 수 있어서 가수나 악기 연주자들과 함께 공연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 번은 마술사와 협연을 하다가 관객들이 마술에 너무 열광해 그냥 낭송 부분을 생략하고 마술공연으로 마무리한 적도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날이라 세상의 모든 커플들은 거리에 범람해 어쩌면 인간은 본디 둘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차라리 사랑이나 연인들을 위한 세레나데 같은 시들로 구성을 할 걸. 그러지 못한 게 소년으로서는 아차 싶었다. 그날의 주제는 '눈'이었다. 생산자의 욕망과 향유자의 그것은 매번 빗나간다. 정작 공연이 시작되자 눈은 그쳤다.  이미 내려 바닥에 자리 잡은 눈은 오래된 애인처럼 질척대고 성가시다. 대여섯 명의 관객만이 소년의 공연에 집중해주었고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자리를 지켰다. 그사이 잠시 서서 구경하다 자리를 뜨는 관객들은 익숙한 풍경이다. 소년은 한 편의 시들이 끝날 때마다 이 시에서 저 시로 넘어가는 연결관계를 자신의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눈싸움하던 고향을 묘사하며 아련한 추억을 끌어내다가 자연스럽게 시로 넘어가는 걸 듣고 있자면 쉬 몰입이 되어 어디까지가 이야기이고 어디서부터가 시인 줄 몰랐다. 그렇게 한 편 한 편 이어지는 시들은 마치 바느질 자국이 보이지 않는 한 벌의 옷을 보는듯했다. 공연 초반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보다 많은 관객이 자리했을 것이다. 그렇게 45분 정도의 공연이 끝났다. 앰프에 연결된 마이크의 줄을 감고 있는데 소녀의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공연 내내 맨 앞자리에 서서 소년을 지켜보던 또래의 소녀였다.


-오늘도 공연 좋았어요.

그렇다면 예전에도 소년의 공연을 보았다는 건데 소년은 처음 본 얼굴 같았다.

-아. 고마워요. 눈이 참 많이 왔는데 끝까지 들어줘서...

소년은 긴장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문장을 도치해서 말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눈에 대한 시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소녀가 공연에 대해 말하는데 소년은 공연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되새기면 아쉬움만 남아서다.

-좋아하나 봐요. 시나 뭐.. 공연 같은 걸요. 혹시 괜찮으세요? 조금만 기다려주실래요... 추우니까.. 저기 건너편 카페에 가 계시면 정리하는 대로 제가....

소년은 아침부터 으스스 오한이 들어서 마치는 대로 집에 가서 몸을 누일 작정이었는데 소녀의 말 한마디에 데이트 신청까지 흘러와 버렸다. 소녀는 수줍은 목례를 하고 걸음을 옮겼고 소년의 시야에서 운동화는 사라졌다.


  



-이 동네에 이렇게 카페가 많았나?

소년의 이마에는 한겨울임에도 땀방울이 굵게 맺혀 있다.

-내가 아까 편의점이라고 말했었나...

공연을 하던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시야가 닿는 모든 카페의 문은 모두 여닫은 후였다. 순간 소녀의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에 소년은 난감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소녀의 운동화만 또렷하게 남아 소년의 발걸음을 따라왔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헛 것을 본 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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