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숲오 eSOOPo
Mar 22.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15회
떨림에서 설렘으로
15
소년은 여느 때와는 달리 일찍 눈을 떴다. 수요 낭송 모임에 제대로 인상을 던져줄 수 있는 두 번째 날이기에 참석 전 미션을 꼼꼼히 점검할 요량이다. 모임을 마치고 나면 노인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설레는 마음이 제각각으로 다른 것이 신기했다. 떨리는 것과 다른 결의 설렘들. 두려운 대상 앞에서의 떨림, 아름다운 이성 앞에서의 떨림, 추운 날씨에서의 떨림. 이처럼 떨림은 쉽게 구분된다. 설렘은 이런 도식 같은 것으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설렌다는 것은 개별의 상황에 유일하게 하나씩만 생성되는 건 아닐까. 떨리는 것은 대상이 나를 흔드는 것이고, 설레는 것은 내가 스스로 흩날리는 것이다. 그래서 떨림은 익숙함에 단련되고 말지만 설렘은 거부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처음이다. 소년은 스스로 떨림에서 설렘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생각하자 피씩 웃음이 나왔다. 머리를 말리고 있던 헤어드라이기의 온도가 올라가자 그 생각으로부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볍게 호밀 비스킷을 계란에 적셔 프라이팬에 구운 것 두 개와 네 등분한 토마토 한 개를 먹고 집을 나섰다.
두 개의 약속 사이에는 충분한 시간의 간격이 있다. S여대 근처에 위치한 낭송 모임 장소와 노인이 만나자고 정한 K궁 근처의 장소와도 거리가 있지만 무리는 없다. 낭송 모임이 있는 연습실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소년이었다. 멤버 간에 약속한 비밀 장소에서 열쇠를 꺼내 열고 들어간 실내는 한적한 시골 성당의 커다란 문처럼 무겁고 차분했다. 연습 시간에 임박해서야 리더와 두 명의 멤버가 도착했다. 지난주에 모였던 인원의 절반만이 참석한 것이다. 리더는 휴대전화를 한참 만지작거리더니 오늘 뒤풀이는 어렵겠다고 한숨에 얹어 말했다. 김이 샜는지 리더는 자신도 급한 일이 생겼다고 짧게 하자고 재촉했다. 지난 만남의 열의는 불과 일주일 사이 상온에 방치해둔 숙주나물처럼 상해 있었다. 처음 마음은 처음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여럿이 무언가를 지속한다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것만큼 불가능하단 말인가. 여러 생각이 들자 소년은 일주일 동안 마음에서 쉼 없이 굴리던 시가 애지중지 키우다 허무하게 죽은 병아리처럼 속수무책으로 느껴졌다. 리더는 한 명씩 준비한 시를 낭송하라고 손짓을 했다. 소년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시를 충분히 숙지하지 못해 흘깃흘깃 보며 읽었다. 소년도 분위기를 거스르기 싫어 준비한 톤보다 낮고 건조하게 낭송하고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장례미사에 참석한 이들과 흡사 닮아 서둘러 리더는 수습하기 바빴다.
-각자 고른 시들이 다들 신선해서 좋았어요. 아무래도 이미지는 외우면서 그려보시고요, 연이 심상의 단위니까 연이 바뀔 때마다 같은 이미지가 이어지지 않도록 하시고...
리더는 수학 공식을 말하듯 낭송의 규칙이 있는 양 설명을 이어갔다. 그때 노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진동으로 전환해둔 터라 리더의 말이 끊어지지 않았다. 소년은 자동 메시지 응답으로 남길 뿐 받지 않았다. 급한 일이 아니길 바라면서.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 주까지 시를 외워 올 것과 중심 정서를 잡아오라는 과제를 거듭 당부하고 리더는 모임을 정리했다. 1층까지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소년은 노인에게 연락을 했으나 신호만 갈 뿐 닿지 않았다.
소년은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고는 전화기로 시간을 보니 아직 약속시간까지 두어 시간 여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