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 살아라
<기본 표현>
잘 먹고 잘 살다
<응용 표현>
에라이, 잘 먹고 잘 살아라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나 두고 봅시다
I 타인의 복 염원 빙자해 자신의 감정 뒤끝 정리 언어
투박한 거래 끝에 다시는 안 볼 결심을 한 이의 뒷모습에 소금을 뿌리듯 던지는 이 말은 자신에게 사용하면(그래! 난 누구보다도 잘 먹고 잘 살 거야!)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나 타인에게 발설하는 순간(자알 먹고 잘 사슈!) 부정적이며 이상한 저주 같은 뉘앙스를 주는 독특한 언어 표현입니다. 욕과 복을 모두 품었기에 호흡과 표정이 어떤 의도인지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얼마 전 가야금 명인의 구두약 사건은 모두의 공분을 샀는데요, 그는 옻칠을 하는 마무리 과정에 구두약으로 작업하는 영상이 유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명인은 적반하장식으로 자신이 개발한 창의적이고 새로운 기법이라고 주장해서 더욱 놀라웠는데요,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두 가지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는 당연하게 옻칠을 한 가야금이라고 생각하고 구입했는데 구두약으로 했다는 거짓말 그 자체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정보가 어긋날 때 화가 납니다. 그것은 구두약이냐 빨간약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과정의 단순화에 대해 사람들은 격이 낮다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명인에게 있어서 여러 단계의 노고를 생략한다는 것은 베이스 국물을 다양한 채소와 멸치로 우려내지 않고 화학조미료로 쉽게 맛을 낸 요리를 내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결과물에 남다른 경외감과 물질적 가치부여를 하는 것이 탐탁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 살아내는 것을 먹는 것으로만 채워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잘 먹고'은 '잘 먹고만'으로 의도가 읽힙니다. 그것은 내장비만과 영양과잉으로 균형이 흐트러진 몸과 삶의 리듬 안에 가두게 되어 결국 잘 살지 못함의 최후를 말합니다. 또한, '잘 먹고'는 상대적으로 부당한 이득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니 '자네가 나로 하여금 취한 적절하지 못한 이윤은 돌려받을 수는 없으나 결코 좋은 쓰임으로 가는 것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보고 싶지 않다네! 그러기에 부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비하시게!'를 줄여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네요.
II 모두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왜 하필이면 의식주중에서 두 번째인 먹는 걸로 저주를 퍼붓는 걸까요? 왜 '잘 입고 잘 살아라'와 '잘 자고 잘 살아라'는 없을까요? 그것은 욕망의 강도에 기인하는 듯합니다. 입는 것은 취향의 문제이고 거주하는 것은 능력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먹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자 욕구의 문제입니다. 입고 싶은 옷이나 살고 싶은 집은 지금 눈에 보인다고 그 해소를 견디기 힘들어하지는 않습니다. 그에 비해 식욕은 직접적인 욕구로 그것을 언급한다는 것은 듣는 이로 하여금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욕구의 소유자로 끌어내려 무참히 인격적 모독을 안기기 위함입니다. 내가 스스로 그 유혹에 취약할수록 더 모욕감을 느끼게 됩니다. 나의 약점에 응원을 보내면 그건 욕일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작은 선행을 베풀었는데 그걸 지켜본 누군가가 못마땅해하며 '아주 평화주의자 나셨네 나셨어!' 한다면 화가 날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 백수이고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도 무서워하고 게다가 평화주의자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랄 때는 결코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저 잘 살게 지켜봐 준다면 그는 잘 먹고 있을 겁니다. 지나치게 상대의 삶과 존재를 단순화하여 빌어주는 것보다는 복잡하고 지난하지만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천천히 작은 걸음으로 갈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오늘도 잘 드시고 잘 살아내는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