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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Jul 23. 2022

나의 초능력들 2

글씨 쓰기 : 손이 짓는 표정들

몸을 위한 메트로놈


무언가를 기록하거나 마음을 전할 때에는 되도록이면 종이 위에 펜으로 글씨를 쓴다. 키보드나 자판은 편리하지만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 같아 피곤하고 쉬 지친다. 나는 발자국이 또렷하게 남는 눈길이나 흙길을 걷는 것 같은 손글씨 쓰기를 좋아한다. 언제부터 발자국 없는 걸음에 익숙해졌을까. 언제부터 펜이 없는 쓰기가 어색해지지 않게 되었을까.


우리 모두는 양손잡이가 되었다. 그토록 기피했던 왼손잡이는 펜을 내려놓자 누구도 알아차릴 기회를 잃어버려 혈액형처럼 숨어버렸다. 그러니 각자의 표정과 성격 같았던 필체를 만나려면 특수한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이모티콘과 폰트라는 메이크업으로 인해 더 이상 상대의 민낯을 보기 힘들어졌다.


연필을 쥔 중지의 손톱 옆 살은 밀려 못나 보이지만 엄지와 검지의 불안정을 도와주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각각은  x y z 축을 이루며 입체적인 움직임의 방향키가 되어 생각을 옮겨놓는다. 몸이 하는 일은 숙련되어도 섬세한 오차들이 발생하는데 이점이 손글씨의 매력이 될 수 있다. 감정과 감성 그리고 상황을 글씨에 담아내는 일은 신비롭고 즐거울 수밖에 없다. 이때 내 몸 전체는 거대한 악기가 되고 글씨 쓰기는 무형의 메트로놈이 되어 나의 몸 상태의 리듬을 통제하고 제시한다.


글씨 쓰기는 나의 초라한 능력이다. 한자씩 한자씩 펜을 눌러 종이에 옮겨 적다 보면 손글씨는 이내 몸 글씨가 된다. 그렇기에 이를 手筆이라고 말하지 않고 肉筆이라고 부르나 보다. 손에서 몸으로 확장되는 변화. 나는 오늘도 온몸으로 밀고 나갈 손글씨를 위해 연필을 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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