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숲오 eSOOPo Jul 22. 2022

나의 초능력들 1

걷기 : 다리로 하는 명상

걷다 - 내딛다 - 깨닫다


나에게는 걷는 능력이 있다. 걷는 것은 멈춘 것과 달리는 것 사이의 움직임이다. 뛰는 것을 즐기지 않기에 걷는 것은 내 두 다리가 할 수 있는 적절한 속도의 움직이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나는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처럼 조금은 구부정한채 가는 팔다리를 흔들며 한발 한발 내딛다 보면 내 몸은 그만큼씩 나아간다. 내가 나무처럼 한자리에 붙박여 있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두 다리가 번갈아가며 앞으로 내딛을 수 있는 걷기 능력 덕분이다. 


걷는 것은 결코 느리지 않다. 그래서 놀랍다. 처음에는 너무 더뎌 막막하다가도 마지막에는 다다른 종착지까지의 거리에 놀라게 된다. 걸음의 느린 속도를 가벼이 여기지 못하게 한 어떤 기억이 있다. 길을 가다 풀어진 운동화 끈을 매려고 한 쪽 무릎을 굽힌 채 자세를 낮추었다. 마침 내 앞으로 허리가 몹시 굽은 할머니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걸음은 달팽이처럼 고요하고 느려서 지나갈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며 캔버스에 그림으로 그려도 될 정도였다. 신발끈을 맨 시간은 늘 그렇듯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작고 익숙한 일이었기에 짧았다. 몸을 일으켜 앞을 바라본 순간 기겁하고 말았다. 할머니는 한참 지나 보이는 모퉁이를 돌아 내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가 실감 나는 순간이었고 자꾸자꾸 걸어가면 온 세상 친구들을 다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걷기를 감히 가장 느린 이동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걷기는 유턴도 없고 좌회전 금지도 없다. 그저 내딛겠다는 의지만 다리에게 전달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걷다 보면 늘 나를 만나게 된다. 달리기는 어느 일정 시간을 지속적으로 달리다 보면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라는 희열과 행복감이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몸이 가벼워지며 리듬을 가지게 되고 피로가 사라지며 다른 에너지가 샘솟는 순간이다. 워커스 하이 Walker's High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걷다 보면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이때 비로소 걷기는 다리가 아닌 머리의 일이 된다. 어제 막혔던 아이디어가 걷는 도중에 불쑥 떠오르기도 하고 잊혔던 지인의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하며 내일 하고 싶어 지는 리스트들이 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니 제대로 걷게 되면 다리가 아프지 않다. 어떤 리듬을 가지게 되고 두뇌활동은 나를 체면 걸어 내 몸이 한계령을 넘는지 문경새재를 넘는지 모르게 한다. 외부보다 자신에게 집중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옛날 사람들이 먼 거리를 가면서 축지법을 썼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걸어보면 믿게 된다. 나는 그것을 '심리적 축지縮地'라고 부르련다. 물리적인 길이는 걸어가면서 쪼그라든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걷는 능력이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 걷는 것이 아닌 걷는 것 자체를 맛보기 위한 걷기다. 나는 걸으면서 책 3권을 썼다. 세 권 모두 다른 장르와 다른 주제를 다룬 책이다. 단지 걸었을 뿐인데 발끝에서 문장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고 있었다. 꼭 책을 쓰기 위해 걷는 건 아니지만 걸을 때마다 나의 혼돈을 흔들어 질서로 가져다 놓는 것은 늘 걷기가 내게 준 별난 부작용 같은 선물이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걷기를 해도 

새로운 공간으로 내딛게 되고 

나를 만나게 해 깨닫게 된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