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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Jul 26. 2022

나의 초능력들 4

응시 : 천천히 오래 바라보기

외부 존재를 내 안에 밀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나는 오래 보려고 한다. 사물도 사람도 천천히 바라본다.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고 멈추면 나도 멈춘다. 그러나 시선은 그것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보는 것이 상대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다. 보려고 애쓰는 것이 마음의 끈을 놓지 않고 오히려 두 사이에 마음의 다리를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언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이때 지켜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몸짓이 된다.
본다는 것은 알아채는 일이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 내려올 때 보았다는 어느 시인의 짧은 시는 자세히 보는 것의 한계 없음을 넌지시 고백하고 있다. 보여지다가 보이게 되고 이해하다가 알아차리고 마침내 깨닫고 상상하게 되는 '보는 것의 신비'는 내가 가진 감각중 단연 막강하다. 보는 것은 오해 같은 언어의 오류가 없다.


보는 것은 겉을 보는 것에 그칠까. 내면은 언어를 통해서만 그나마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랫동안 상대의 겉만 지켜보아도 그의 내면이 슬며시 비쳐 새어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모든 애견 애묘인들은 속이 터져 동물과 공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가 키우는 개와 고양이가 말을 못 해 답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통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둘 만의 언어가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가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이다. 그것은 식물도 그러하다. 자주 바라보는 식물은 시들거나 말라죽을 수가 없다. 오래 바라본 식물은 어김없이 그들의 욕망을 내게 던지기 때문이다.


빛을 받은 밝은 부분을 스치듯 보는 것이 관광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빛으로부터 방치된 곳과 무관한 것을 인내심 가지고 지켜보는 응시가 자리하고 있다. 이때 바라볼 핵심은 눈과 몸짓이다. 앞뒤 구분이 있다면 사물도 눈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자연이라면 전체가 눈이다. 시나브로 보다 보면 대상은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그 조각들은 내 안으로 들어와 재조합되기 시작하는데 이때 대상의 본질이 해독되기 시작한다. 눈이 정면을 대표하는데 눈빛과 시선이 거짓들을 필터링해서 전달한다. 몸짓은 뒷모습을 대표하는데 어느 누가 뒷모습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손도 발도 목도 후면에 속하며 이 부위들은 거짓말 기능이 들어있지 않다.


보는 것만으로 진실을 알아가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 사람만이 못 참고 입을 연다. 답답한 것은 해소되지만 온전하게 대상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는 달아나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열심히 달려간 그곳 '오해의 깊은 성'에 갇히게 될 것이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천천히 바라보는 일이다. 나의 눌변이 어쩔 수 없이 응시로 옮겨갔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언어적 무능이 시선의 능력을 키운 셈이다. 예전의 '말하기 콤플렉스'를 털어내고 이제는 '보기 초능력'으로 옮겨갈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을 보고 있어요'만큼 강력하고 매력적인 사랑의 언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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