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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Sep 04. 2022

나의 초능력들 43

우연 즐기기 :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양념

계획이 치밀할수록 우연과 친해지고 익숙해야


나의 엠비티아이에는 계획적이다라는 특성이 있다. 수긍한다. 설계도가 없는 하루는 손님을 태우지 않은 택시와 같다. 움직이지만 정처 없다. 그러다가 손님을 태우는 순간 쏜 살같이 목적지를 향해 내달린다. 조금 노련한 기사라면 내비게이션의 정해진 노선보다 자신의 머릿속 최적의 경로를 따라 유연하게 목적지까지 모실 것이다. 나의 계획에 대한 입장도 이와 유사하다. 이미 준비된 피피티 자료를 순서대로 펼쳐 보이며 연습한 멘트를 재생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안정적인 마무리는 보장되지만 거기엔 현재성이 결여되어 속된 표현으로 지루하다. 진부한 건 딱 질색이다. 계획적인 성향에 뻔함을 싫어하는 천성을 절충할 묘안은 무엇일까.


우연성을 과감하게 계획에 편입시키자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강을 할 때에는 여유 있게 시간을 두고 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정리하고 가상의 강의를 상상으로 그려본 후 그다음부터는 잊으려고 애쓴다. 1/3 정도 잊을 무렵 청중 앞에 선다. 절반 이상의 지도만으로도 길을 잃지는 않는다. 미완의 부분은 그날의 청중과 같이 만들어 간다. 내가 맘에 들어 일방적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 곳이라고 그들을 끌고 가고 싶지 않아서다. 가면서 작은 오솔길 정도는 이야기 나누며 새는 것도 강연을 풍성하게 하고 나를 즐겁게 긴장시킨다. 그것이 서로가 죽이 잘 맞으면 절반의 코스를 수정하기도 한다. 강연자가 확신이 있으면 돌아가도 목적지를 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등산에서 말하는 정상을 고집하는 등정주의가 아닌 경로를 존중하는 등로주의라 할 수 있다. 어디를 신속하게 밟는 것보다 어떻게 새롭게 가느냐를 취하게 된다.


여행에서도 우연은 훗날 추억할 때 특별함으로 기억된다. 특히 여행 전 맛집을 검색해 일정에 넣는 것을 금기시한다. 가장 훌륭한 식당은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곳일 테다. 그들은 일상 같은 먹거리에 가타부타 후기를 남기거나 유난을 부리지 않는다. 그리고 굳이 여행 가서 여행자들만 북적거리는 식당에서 뜨내기손님에 지친 종업원의 달갑지 않은 눈길과 기계적인 서비스도 탐탁지 않게 느껴져 기피하게 된다. 마을 어귀 어느 한적한 길을 걷다가 허기를 느낄 즈음 우연히 만나는 그지역 거주민들과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인터넷 여행 관련 정보보다 실하고 풍성하다. 우연한 초대를 받기도 하고 우연한 명소를 안내받기도 한다. 나의 여행에서 우연은 배낭보다 긴요하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삶에서 우연이라는 변수를 배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져와 활용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기도 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합리적으로 다루는 나만의 방식일 수도 있겠다. 기상청의 슈퍼컴퓨터로 아무리 꼼꼼하게 계산해도 오늘 오후의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예측하는데 실패했다. 일주일 동안 프레젠테이션을 철저하게 준비해도 한 질문자의 돌발적인 개입에 엉망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무방비를 권하는 건 아니다. 방향이 명확하지 않으면 우연도 내게 힘을 실어 주지 않는다. 더 큰 방해자가 된다. 막상의 우연을 막연히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일상이 다채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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