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기 : 삶의 맥박을 느끼는 순간
매일 수많은 정보들이 날아든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중 건전하고 실한 것들만 잘 추슬러 지식으로 묶어 뇌에 저장할 수도 있다.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아쉽고 부족하게 느껴진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 기껏해야 나중에 잘 정돈된 지식을 꺼내 선보이거나 전달하거나 참고할 때 유용한 정도다. 그렇다면 앎의 숙성이 절실해진다. 알고 나서의 다음 단계, 조금 더 한걸음 나아간 깨달음의 순간이 있다. 아는 것이 절반의 모방과 흉내를 담고 있다면 깨닫는 것은 완전한 내 것의 탄생과 발명이 된다.
제대로 모르고 있던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 따위의 숨은 참뜻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을 깨닫는다고 국어사전은 풀이한다. 제대로 모른 것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제대로는 '적당한', '알맞게'라는 의미도 있지만 '마음먹은 대로'의 뜻도 담고 있다. 그러니 몰랐던 어떤 깊은 의미를 내 의지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닫는 것은 결코 우연히 영감처럼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적극적인 의지로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는 것이 수동성이라면 깨닫는 건 능동성이다.
어찌 깨달음이 매 순간 날마다 일어날 수 있겠는가. 세상 모든 이치와 사물을 통해 깨닫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모든 감각의 문들이 깨알같이 촘촘하게 닫혀버린다. 의지를 부려야 할 곳은 깨달음이라는 추상적이고 불가능한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히는 것에 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불꽃놀이의 마지막 터지는 순간의 환희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폭죽의 프로그래밍에 있을 것이다. 노란색의 불꽃은 나트륨, 주황생의 불꽃은 칼슘, 보라색의 불꽃은 칼륨의 금속 원소가 불꽃의 다양한 색을 만들어 내듯 내가 어떤 금속 원소 같은 시선으로 정보와 지식을 바라보고 재조합하고 상호 연결하느냐의 수고가 가미되어야 한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정보나 지식과 만나면 천천히 깨달음으로 넘어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정보에 아는 것만으로도 벅차 깨달음을 놓치고 사는 요즘이다. 깨달음 실종의 시대라고 칭하고 싶을 정도다. 아는 것은 급히 챙겨 넣을 수 있는 것에 반해 깨닫는 것은 차분한 묵상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리듬에서만 가능하고 취득되는 결과물이 깨달음이다. 타자의 깨달음이 내 것으로 올 때에는 또 다른 정보에 불과하다. 아는 것은 전파, 습득되지만 깨닫는 것은 자생, 자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글을 쓰며 깨달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