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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Sep 20. 2022

나의 초능력들 58

자전거 타기 : 요행이 없는 움직임

두 바퀴로 길 위에서 인생을 읽다


아주 오래전 바야흐로 20세기 말, 어느 해 여름.

유럽으로 한 달 넘게 배낭을 메고 가난하게 다녀온 터라 여전히 밤마다 꿈에서는 유럽의 골목을 휘저으며 고 있었고 베르사유 궁전 앞 정원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밤낮의 시차만큼 현실과 여행지가 뒤죽박죽 얽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무렵, 다시 여행 짐을 꾸렸다. 이번에는 우리나라를 구석구석 직접 두 다리로 밟아보고 싶었다. 자동차와 걸음의 중간 지점에 자전거가 있었다. 자전거라면 어디라도 갈 수 있으리라는 건강과 호기심이 적절하게 내 몸에 무장되어 있었다. 사실 유럽 배낭여행으로 더욱 가난해진 주머니였기에 매일 만 원씩의 예산으로 30일 동안 전국을 완주하는 무모한 계획은 거의 무전여행에 가까웠다. 날마다의 숙박문제는 자전거 뒷자리에 실은 텐트로 해결키로 했다.(일주일 후로는 치고 접기 귀찮아져 시골 교회의 빈 공간들이 텐트를 대신했다.) 그리고 대전을 출발지로 경기 강원 경상 제주 전라 충청으로 돌아오는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유일한 자전거 전국일주의 철칙은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로 히치하이킹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번 달콤함을 맛보게 되면 분명 그 후로는 자주 그 유혹에 빠질 것이며 무엇보다도 완주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교통수단의 도움은 부산에서 제주로 넘어갈 때와 제주에서 목포로 넘어올 때뿐이었다. (물 위로 자전거를 타고 가고 싶지만 아직도 그 방법을 못 찾고 있다) 7월의 강렬한 태양 아래 강원도의 높고 잦은 고갯길들은 나의 연약한 허벅지 근육들을 찢고 허약한 심장들을 폭발 직전으로 몰아갔지만 지나가는 빈 트럭을 세우는 일은 다행히 없었다.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가는 길이 앞에 펼쳐졌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는 만큼만 나를 옮겨주었고 오르막의 수고는 내리막으로 보상해주었다. 안장에 엉덩이가 익숙해질 무렵 어느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양 옆으로는 신작로와 함께 논이 끝도 없이 흐르고 있었다. 오래 달리다 보면 정면과 앞바퀴 아래의 중간지점에 시선이 붙박이는데 이때에는 내가 달리고 있는지 바닥이 뒤로 밀리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불현듯 자전거는 순간 해체되고 나의 지난날들이 눈앞에 펼쳐지며 삶의 물음들이 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가고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놀랍게도 두 발을 쉼 없이 구르고 있는데 부지런해지는 건 머리와 가슴이었다. 늘 그렇듯이 치열한 순간이나 벼랑 끝에 서 있는 순간에는 의미 있는 질문들이 해결책보다 서둘러 앞으로 나서서 나를 곧추세우고는 했다. 방법을 찾고 정답을 고르는 것이 여행의 목적은 아니었기에 그저 그 물음들을 주렁주렁 자전거에 달고 달렸다. 한 달 내내 그 질문들은 내 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곰삭아갔다. 이렇게 바이서클스 하이를 느끼며 한반도의 뜨거운 국토를 사색하기 좋은 속도로 여행하고 있었다.


자전거도 일정 시간을 달리다 보면 철학책의 책장을 넘기는 것과 다름 아님을 느낀다. 육체를 격렬하게 사용할수록 정신은 지속적으로 자극된다. 그 자극은 신비롭고 아름답다. 평소의 움직임에서는 나지 않는 생각을 떠올려주기에 신비롭고 평소의 상상력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이미지들을 선사해주기에 아름답다. 이는 눈앞의 풍경뿐만 아니라 내면의 그림들도 다채롭게 펼쳐 보여준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남겨진 사진들은 없지만 나의 세포들은 기억하고 있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두 발 자전거를 타고 세상 어디로든 내달리는 것이다. 영사기를 돌리듯 페달을 밟다 보면 내 젊은 날의 필름들이 길 위에 스크린처럼 펼쳐진다. 아쉬울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나날이지만 그런 가난하고 뜨거운 젊은 날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있을까. 빼곡한 도시의 빌딩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한 소녀의 자전거가 보인다. 그녀는 먼 훗날 자전거에서 바라본 풍경을 어떻게 추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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