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용품 만지기 : 인형보다 다정한
어린 시절 친구끼리 주고받는 생일 선물은 주로 연필, 공책, 크레파스, 연습장, 사인펜 등 학용품이었다. 학교 앞 팬시점도 아니고 문방구도 아닌 모호한 상점에서 구입한 학용품은 고르는 순간부터 설레었다. 동물을 닮은 지우개, TV 만화 주인공이 그려져 있는 스케치북, 특별한 쓸모를 가지지 않은 장신구 등을 주인의 눈치를 보며 만지작거리며 호주머니 속 사정과 견주어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항상 유치한 디자인이 입혀진 학용품이 눈에 더 자주 들어왔고 인기 있는 캐릭터라면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가지고 싶은 학용품이 친구에게 선물할 품목이 되었다. 대체로 내 서랍 속의 학용품은 친구들의 취향이 반영되었고 친구들의 필통에는 내가 좋아하는 학용품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한 번도 받은 즉시 학용품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이미 내 책상 한 켠에는 쓰고 있던 학용품들이 충분했고 새것으로 대체하기에는 선물 받은 학용품들이 아까웠던 것이다. 아끼다 똥이 되더라도 난 새 학용품을 바라보고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 용도에 충분하다고 느꼈다. 여전히 포장이 뜯기지 않은 채 얌전히 모셔져 있는 학용품을 수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낡은 선물상자에서 발견한 적도 있다. 무엇이 아까워서 그 많은 지우개들과 연필들과 공책들을 신줏단지 모시듯 사용하지 않은 것일까. 왜 그랬을까.
무엇보다도 학용품은 예뻤다. 어린이의 취향에 맞추어 구매욕구를 자극하려고 디자인한 것이 나에게는 소장욕구까지 만족시킨 것이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대형 서점에 가서도 학용품을 파는 코너는 참새방앗간처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서점에 가서 책이 아닌 학용품을 잔뜩 안고 돌아오기도 했다. 나는 서점을 자주 갔었는데 오랜 시간을 책들을 펼쳐 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와서 가방을 열어보면 온통 아기자기한 학용품이 가득했다. 나는 책을 좋아해서 서점에 간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담배를 사러 담배가게에 간 것이 아니라 담배가게 아가씨를 보러 간 것이었구나. 어쩌냐. 학용품이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럽고 앙증맞은 걸!
학용품을 바라보다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학용품이 공부를 대신해주는 것도 아닌데 학용품이 완비된 상태가 되면 전투에 완벽하게 대비하기 위해 무장한 군인이 된 듯 의욕에 불탔다. 개학을 하고 첫 수업을 하러 가는 날에는 네모 반듯한 플라스틱 2단 필통 속의 연필들은 스포츠머리를 한 용사들의 도열처럼 절도 있게 놓여 있었다. 하루 종일 연습장에 '깜지'를 써도 닳지 않을 분량의 연필은 쓰기 위함이 아니라 보기 위함이었다. 잘 정비된 학용품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학생의 마음이 된다. 이럴 때에는 여자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애착 인형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학용품도 이처럼 다정할 수 있다니!
나의 초라한 능력은 학용품을 바라보고 만져보고 소장하는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학용품을 선물해주면 아이와 같은 표정이 된다. 세상에는 이토록 학용품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넘친다는 것에 놀랍다. 학용품은 자꾸 꿈꾸게 한다. 학용품은 나를 다소곳하게 하고 학생이 되는 마법을 부린다. 학용품은 동화처럼 다정한 사물이다. 판타지로 나를 초대하고 경험하게 하고 기억으로 남는다. 쓰면 쓰는 대로 친근하고 보면 보는 대로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