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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Sep 28. 2022

사물과 마음 사이 IV

거울과 기억

거울은 고요한 기억이다


거울 앞을 지나다 발길을 멈추고 몸을 틀어 거울과 마주하는 소녀가 보인다.

옷매무새만 고치지 않는다.

무심한 표정도 고치고

이미 단정한 복장도 고치고  

저만치의 그림지도 고친다.

그녀는 긴 시간을 거울과 마주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린다.

입을 맞추려는 듯 입술을 동그랗게 만다.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하지 않는다.

소녀는 백설공주에 나오는 왕비처럼 거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일까.

어쩌면 체면을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길고 긴 체면의 주문을 모두 마친 후에야 발을 뗄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주문 중에 실제로 효력을 발휘해 아름다워진다. 그렇게 믿어버린다.

그렇지 않으면 더 강한 체면으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아. 세상 사람들이 나만 바라보면 어쩌지? 태연하게 행동하자. 난 겸손하니까!'

대체로 가장 좋은 체면은 그 고요했던 기억으로의 집중일 테다.

거울 앞에서 기억을 활성화하지 않는 이는 없다.

기억을 차단하면 거울은 비로소 오프 된다.

기억이 거울의 스위치다.

거울은 온전하게 반대쪽을 보여준다.

오른팔을 들면 거울 속의 나는 왼팔을 든다.

그러나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몸을 보여주는데 나의 마음이 뒤척인다.

돌아보게 한다. 거울이라는 사물은.

자꾸 몹쓸 기억으로 고요하게 이끈다.

고개를 돌려 본다.

거울 속의 나는 존재하는가 소멸하는가.

내가 볼 수 없는 거울 속의 나는 무슨 소용인가.

다시 고개를 돌리니 내가 거기에 돌아와 있다.

미래의 어느 날 나의 기억들이 가물가물해지는 육체가 되면 거울이 나를 지키는 마지막 사물이 될 것 같다.

그때에는 거울이 영사기가 되어 엉망으로 편집된 나의 기억을 랜덤으로 보여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상하가 아닌 좌우로 흔들며 긍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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