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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pr 19.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44회

아직도 시를 외우시나요

44




고백하건대 이것은 사실이다.

소년은 한 번도 시를 외운 적이 없다. 암송으로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낭송가가 시를 외운 적이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정말이다. 소년은 외우는 행위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외운다는 말에는 '억지로'라는 부사가 자연스럽게 붙게 된다. 어떤 강제된 주입과 내키지 않는 무리함이 담겨 있어서 불편하다. 학창 시절 암기과목에 취약했던 소년은 좋아하는 시를 무대에서 선보이려면 외워야 한다는 점에 주저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소년은 단 한 번도 시를 외워본 적이 없다. 정말 그렇다니까 그러네. 알았으니 제발 지금 잡고 있는 소년의 바짓가랑이를 놓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옆에 앉아 그 사연을 차분히 들어보시길.


한 번은 이런 적이 있다. 친구를 만나러 급히 약속 장소로 달려가던 소년은 막 코너를 돌 무렵이었다. 돌아서자마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면 종착지다. 약속시간에 철저한 소년은 보통 만나기 30분 전에 먼저 도착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다. 즐긴다는 것은 마음이 편하다는 거다. 배려로 생각하는 상대방은 감동을 받곤 하지만 소년은 스스로를 배려한 거라고 여겼다. 여유 있게 준비하면서 만남의 기쁨을 선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만남 자체도 순조로웠다. 그날은 집에서 정류장까지 가는 길을 내려가는데 오르막길을 올라오는 어르신을 보았다.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리어카에 산만한 종이박스를 싣고 중력과 사투하고 있었다. 한발 한발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십자가를 진 예수 같았다. 어르신의 표정은 가시관을 머리에 쓴 듯 일그러져 있었으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면서 딴생각을 하느라 이미 시간을 써버려 겨우 약속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어르신을 지나치는 듯하더니 소년은 몸을 돌려 말없이 리어카에 두 손을 얹었다. 몸을 45도로 숙여야 리어카는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금세 소년도 땀으로 온몸이 뜨거워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10미터만 도와주려는 생각을 고쳐 무려 50미터가량을 밀고서야 몸을 세웠다. 경사진 곳에서 그만 두기에는 소년은 죄책감이 들었다. 평지가 되자 소년의 도움 없이도 리어카의 속도는 충분했다. 어르신은 아무 말도 없었지만 소년은 서운하지 않았다. 200미터를 더 가면 있는 폐지 처리시설까지 도와주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러니 약속 장소 앞에서 주위가 산만해져 그만 돌아 나오는 경차를 보지 못한 것이다. 소년도 놀랐는데 운전사는 더욱 놀랐는지 목소리가 우렁찼다. 창문을 열고 머리에 태양을 한껏 받아 한참을 떠드는데 이미 소년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가 되어 있었다. 연신 몸을 숙여 사과를 했지만 대머리는 가슴이 놀란 건지 머리가 열난 건지 멈추지 않았다. 뒤에서 밀린 차들이 바쁘지 않았다면 소년을 향한 대머리의 일장연설은 길이 남을 뻔했다. 소년은 그날 약속을 마치고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이상하게도 낮에 들은 그 수많은 말들이 개연성으로 연결된 문장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재생되는 것이 아닌가. 화가 난다기보다는 너무 신기하고 놀라웠다. 대머리의 표정, 손짓, 눈빛, 가끔씩 머리를 스스로 어루만지던 두툼한 손과 말끝마다 붙이는 버릇 같은 말투까지 종이에 적어보았다. 소년은 외우지 않았지만.. 외우고 싶었겠는가. 외우려 하지 않았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은 알아차렸다. 기억은 외우려 하지 않아도 외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은 암기를 '교통사고 복기하기'라고 말하곤 했다. 그 후로부터 소년에게 외운다는 것은 사건화하는 일이었다. 사랑에 관한 시를 외울 때에는 소년의 가슴에 사랑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이 뜨거워질수록 낭송은 달달했다. 이별에 관한 시를 외울 때에는 소년의 가슴에 슬픔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이 깊어질수록 낭송은 절절했다. 이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이제사 알아들으셨나 보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소년은 한 번도 시를 외운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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