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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pr 28. 2022

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53회

깊은 마음을 전할 때엔 느리게 느리게

53



노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꼭 오늘은 해야겠다고 혼잣말을 했다. 요 며칠간 다짐했던 마음을 소년에게 글로 전하고자 차일피일하던 참이었다. 한 이틀 더 미루다간 달이 바뀌게 되고 정리된 마음이 느슨해질 것 같아 더 조급해진다. 흔들리는 몸을 의자에 걸치고는 서랍을 열어 만년필을 꺼냈다. 지난 해외 일정 때 연착으로 인해 무료한 시간이 넘쳐 면세점을 둘러보다 충동적으로 구입한 만년필이다. 버건디 색상에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모티브로 제작한 만년필 시리즈 중 하나다. 노인은 몇 번 종이 위에 좌우로 써보더니 잉크가 말라 있음을 알아차리고 컨버터를 열어 잉크를 가득 채웠다. 실레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직접적이고 솔직한 느낌이 형상적으로 만년필 겉면에 담겨 있는데, 수제 만년필의 천국 이탈리아 제품이다. 펜촉이라 할 수 있는 닙 부분의 중앙에는 하트 모양의 홈이 있었다. 글을 쓰다 생각이 나지 않을 때에 이 부분을 보면 이상하게도 문장이 떠오르곤 했다. 안부는 날씨 이야기가 자연스러웠고 계절과 연결해서 풀어가는데 무리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년필로 글을 쓰는 필기감이 근사했다.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필기감은 단편소설도 단번에 써 내려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의 마음은 그와 반대에 자리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가는 몸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쯤에서 소년에게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하나씩 새 부대에 옮겨 담고 싶었다. 그것이 남은 시간에 해야 할 노인의 소명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젊은 시절 영화에 빠져 방황하던 이야기와 잠시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었던 시기의 이야기를 적어나가기도 했다. 시와의 인연, 시낭송을 하게 된 우연의 기회들을 들려줄 때에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후반부에 가서야 현재의 건강과 병명을 우회적으로 설명하며 자신의 마인드와 철학들을 소년에게 전수하고 싶다는 말로 편지를 끝맺었다. 간편한 문자메시지도 있었지만 가장 느린 의사전달 방식인 보통우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창구에서 우표를 한 장 달라고 하자, 여직원은 요즘은 우표를 붙이지 않는다며 금액이 적힌 직사각형의 흰 스티커를 붙여 옆 커다란 우편 분리함에 던졌다. 큰 바구니에는 국내우편이라고 적혀 있었다. 구멍이 숭숭 난 바구니 사이로 작은 편지봉투가 빠지지 않을까 썩 미덥지 않았으나 일주일 후 소년에게서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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