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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인이지만, 호스텔이 좋다고?

당신이 내향인이어도 괜찮다. 도미토리에 커튼만 있다면.


이렇게 제목을 써놓고 보니 왠지 “외향인이 내향인보다 호스텔에서 더 잘 지낸다”는 뻔한 얘기가 나올 것 같지만, 아니다. 나는 무려 거금 10여만 원을 내고 MBTI 정식 검사와 심리 상담까지 거쳐 정확한 판정을 받은 검증된(?) 내향인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호텔 싱글룸보다는 호스텔 도미토리가 편안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호스텔에서 대화와 만남의 장이 펼쳐지는 아침 조식 뷔페 시간. 누군가와 말을 섞기 싫다면 잘 피해가도록 하자.


사실 내향인에게 호스텔은 꽤 괜찮은 선택이다. 저녁마다 이벤트가 있거나 파티가 열리는 호스텔을 재주껏 잘 피해 간다면, 호스텔 직원을 제외하고 그 누구 하고도 말을 섞지 않고 여행을 할 수 있다. 같은 방에서 머무르는 사람들끼리 간혹 대화를 할 일이 생기지만 졸업 후 영어에서 손을 뗀 사람도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 호스텔에서 내가 가장 많이 말한 영어는 아래 두 문장이기 때문이다.


“Where are you from?”

“I know your country is really beautiful.” (상대방의 출신 국가가 설사 내가 잘 모르는 나라라 할지라도, 이렇게 말했을 때 기뻐하지 않는 외국인을 본 적이 없다)


호스텔에 묵으면서 미국부터 모로코, 중국에서 크로아티아까지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보통은 각자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확인한 다음 대화는 끝나고, 호스텔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제각기 갈 길을 가고 할 일을 한다.


아주 멀고 먼 옛날에는 같은 도미토리 룸에서 묵는 사람들끼리 친해져서 여행 동행이 된다거나 저녁을 같이 먹는 일도 일어났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 내가 묵었던 일본, 베트남, 태국, 스페인의 호스텔에선 그런 일은 잘 벌어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혼자 온 사람들이 많았고 다들 남들과 말을 섞기보다는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했다.


물론 나도 먼 옛날 베트남 달랏의 호스텔에서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과 뜻이 맞아 택시를 타고 전망대까지 가서 달랏의 야경을 보고 맛집에서 디저트를 먹기도 했고, 역시 먼 옛날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만난 분과 마드리드 왕궁 앞에서 서로 수십 장씩 스냅사진을 찍어준 적도 있고, 스페인 타라고나에서 만난 분과 천둥번개가 치는 밤바다를 목숨 걸고 산책한 적도 있다. 지나 놓고 보니 뭐 다 재미있는 기억이다. 하지만 보통 그런 일은 여행지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다들 거기서 만족한다.


호텔 대신 호스텔을 선택하는 나 홀로 여행자들은 의외로 남들과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배정받은 침대 번호를 찾지 못해 헤매거나, 락커의 자물쇠를 잠그는 방법을 모르거나, 맨발로 들어가야 하는 공간에 신발을 신고 오거나 하는 등 도저히 가만히 지켜볼 수 없고 나서서 도와줘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대개 그 누구도 일부러 말을 걸지 않는 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호스텔의 이미지, 특히 예약 사이트의 호스텔 대표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선남선녀가 도미토리 베드 옆에 서서 즐겁게 환담하는 것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인 것이다.


호스텔에 커튼이라는 세련된 문물이 도입되면서, 같은 방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일은 줄어들었다.


도대체 왜일까? 나도 여러 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요즘 시설 좋은 호스텔에 반드시 갖춘다는 "개인 커튼"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위 사진을 보자. 보통 사람들은 도미토리 룸에 들어온 다음엔 자신만의 프라이버시를 오롯이 누리기 위해 대부분 커튼을 친다. 실제로 커튼을 치고 도미토리 침대에 누워 보면 매우 아늑한데, 어렸을 적 식탁 밑에 들어가 놀았을 때 맛보았던 그 느낌, 나만의 아지트에 막 들어온 것 같은 비밀스럽고 안전하고 보호받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는다. 물론 도미토리 룸에서 나갈 때도 커튼을 친다. 누군가가 침대 안을 들여다본다면 소지품을 도난당할 확률도 매우 높으니까, 아무래도 시선을 애초부터 차단하는 것이 안전한 것도 사실이다. 간혹 커튼을 활짝 열어두고 침대에 걸터앉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찐 외향인도 있긴 하다.


외향인들은 호스텔에서 혼자 영혼 없는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내향인을 발견하면 그냥 놔두지 않는다. 태국 방콕의 어느 호스텔에선 도미토리 룸에 들어선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말을 걸던, 중남미 어디선가에서 온 분과 마주쳤다. 이분이 바로 커튼을 활짝 열고 언제든지 소통할 의지가 있음을 온몸으로 부르짖는 그런 외향인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려고 해서 적당히 웃으면서 대답하고 얼른 나왔다. 왜냐면 나는 누군가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면 급속도로 피곤해지는 내향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녁에 귀가해보니 그는 방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고 몇 마디라도 대화를 하려고 했다. 다음날 아침 조식 뷔페 테이블에서는 다른 방 사람들에게도 역시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고 몇 마디라도 대화를 하려고 했다. 솔직히 이런 분들을 보면 존경하는 마음과 부러워하는 마음이 동시에 무럭무럭 솟아오른다. 왜냐면 나는 평생 익히지 못할 스킬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내향인이고 호스텔에서 나만의 시간을 누리고 싶다면 꼭 노트북을 펴놓고 앉도록 하자.


하지만 솔직히 내가 외향인이라면 호스텔은 매우 즐거운 공간일 것 같다. 왜냐하면 호스텔에 머무는 사람들은 보통 숙박 기간이 짧으니 말을 걸 만한 새로운 사람들이 항상 리필되고(?) 호텔에 비해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도 실례(?)가 되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다들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다가도 누가 들쑤시면 파티나 단체 게임 비슷한 것도 벌어진다.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 영어로 논쟁하는 것도 여러 번 봤다. (정말 거기 끼고 싶었다. 영어회화를 왜 진작 더 연마하지 않았나 그때 처음으로 후회했다)


베트남 하노이에선 운 나쁘게도 매일 밤 파티가 열리는 호스텔에 묵었는데 이곳은 공용 라운지에서 매일 밤 정해진 시간에 무료로 생맥주 한 잔을 주는 통 큰 이벤트를 펼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의 대형 호스텔이 이런 파티 분위기가 매우 강했다.) 바깥에 나가면 몇 초만에 땀이 흘러 선크림이 곧바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하노이의 5월의 날씨에 시달리던 나는 맥주의 유혹을 참을 수 없어서 왁자지껄한 공간 한가운데에 혼자 앉아 차가운 맥주를 허겁지겁 들이켰는데, 맞은편에 앉은 리넨 셔츠 차림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Where are you from?”

“South Korea.” (호스텔을 떠돌다 만난 외국인들은 모두 내가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는지 노스 코리아에서 왔는지 꼭 물어보기 때문에 무조건 이렇게 정확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대화가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다… 언젠가는 “노스 코리아에 가봤니?”라고 해맑게 묻는 그루지아 사람에게 “내가 노스 코리아에 갔다 오면 우리나라 정부가 굉장히 싫어할 거다”라고 길게 설명한 적이 있긴 했다…)

“Yeah, I’m from New York. Do you like this hostel? And I have been to Paris, London,~”


이런 경우엔 좀 심란하다. 이미 낮 시간 대부분을 박물관을 돌고 유적을 탐험하고 서점을 뒤지고 슈퍼마켓에서 저녁거리를 사느라 지친 내향인 여행자 1은 어서 저녁을 먹고 씻은 다음 쾌적한 동굴 같은 도미토리로 올라가 커튼(만약 있다면)을 치고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핸드폰을 들고 내일 돌아볼 곳의 입장 시간과 입장료를 체크하고 그새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사실 외국에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되지 않나) 검색도 해봐야 하는데 말이다.


내향인이 철벽을 친 것을 모르고 근처에 맛있는 쌀국수 가게가 있는지, 자기는 노르웨이에 갈 예정인데 어디를 가봐야 하는지, 한국 사람들이 미국 주식을 살 수 있는지 물어보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다행히 디지털 노매드로 전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이 전업투자자 뉴요커는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끼리 의사의 직업윤리에 대해 논쟁하다 결국 싸움이 붙은 것을 구경하더니 그리로 가서 참전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래서 나는 호스텔에서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좀 부담스러워하는 편이다. 십중팔구 그들은 외향인이다. 내향인들은 그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하거나 눈웃음을 지어줄 뿐이고 가급적 말을 걸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향인 동지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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