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팝콘처럼 가볍고 바삭거리는 연결이 가능한 곳이 있을까?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기 얼마 전, 일본 센다이로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호텔 싱글룸에서 자다가 한밤중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는데 영 기분이 이상했다. 침대 밑에 뭔가 커다랗고 말캉한 젤리 같은 것이 있고 그게 심하게 요동치는 것 같은, 생전 처음 마주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새벽 3시쯤이었고, 다른 방에서 자고 있을 동료에게 문자를 보내봤지만 답은 없었다. 그렇게 무서워하며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호텔 직원에게 물어보니 지진이 일어나긴 했는데, 그다지 심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낯선 남의 나라에서 혼자 어떤 생경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그 공포는 꽤 오랫동안 내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호텔 1인실이 아니라 호스텔 도미토리에 묵었으면 아마 좀 달랐을 거다. 지진이 일어났다면 온갖 나라 언어의 감탄사와 함께 모두 일어나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물었을 테니까. 호스텔은 사실 다른 사람과의 적절한 거리는 보장되면서, 또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는 얼마든지 가능한 묘한 공간이다. 만약 내가 호텔에 머물렀다면 내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등 뒤로 문을 닫아걸고 그다음 날 아침 호텔 직원과 마주칠 때까지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게 된다.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호텔 로비나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는 어쩐지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호스텔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공용 욕실에서 먼저 세수를 하고 있던 누군가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슬쩍 자기 소지품을 옆으로 밀어두면 나는 활짝 웃으면서 목례하며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녀 역시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건넬 것이다. 주방에서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버튼 조작부가 있는 전자레인지를 앞에 두고 심란해하다가 바로 옆에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전자레인지 사용법을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쓰며 물어보면 자기 요리는 까맣게 잊고 도와준다. 같은 숙소에 묵는다는 이상스러운 친근함이 호스텔 전체를 떠다닌다.
‘너는 여행 경비를 아끼려는 강한 의지가 있구나?’
묻지 않았지만 이런 공통점으로 하나가 된다.
사실 좀 매너가 없는 사람도 그냥 참아주는 것이 호스텔 문화다. 적어도 내가 묵어 본 호스텔에서는 얼굴을 붉히며 따지거나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혹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주변의 다른 호스텔 동료(?)들이 황당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면 매너 없던 사람도 슬쩍 꼬리를 내릴 것이다. 호스텔은 그런 곳이다.
언젠가는 호스텔의 공용 라운지에서 한 달 동안 애지중지 캐리어 안쪽에 모시고 다니던 불닭볶음면 컵라면을 드디어 개봉해서 감격하며 후루룩 먹고 있을 때였다. 바로 옆에서 빵으로 저녁을 때우던 튀니지 여자분이 대체 그거 어디서 샀냐고 간절하게 물어봐서 안타까왔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샀다고 하니 그녀 역시 매우 안타까워했다. 내가 입을 대지 않았다면 한두 젓가락 맛을 볼 수 있도록 같이 먹자고 했을 텐데 이미 면을 끊어 먹은 뒤였다. 이후로 그녀를 호스텔에서 마주칠 때마다 웃으며 인사를 나누곤 했다. 호스텔은 그런 곳이다.
어떤 호스텔에서의 일이다. 아침 식사로 빵과 잼과 버터와 양상추를 차려 놓고 ‘잡지 <킨포크> 에 나온 사진 같은 느낌인데?’하면서 스스로 만족해서 냠냠 먹고 있는데,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어느 중년 여성 여행자가 조용히 내 옆으로 와서 포도 한 팩을 내밀었다. 자기는 오늘 체크아웃하고 비행기를 타는데 포도가 남았으니 괜찮으면 먹으라는 것. 나는 호스텔 주방에서 항상 아침을 제대로 차려 먹곤 하는데, 그걸 눈여겨본 때문인지 의외로 이렇게 식품을 기부하고 가는 동지들이 많았다. 나야 고마울 따름. 호스텔은 그런 곳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같은 도미토리룸에 묵었던 이탈리아 할아버지가 체크아웃을 하면서 가지고 있던 와인 한 병을 나에게 주고 떠난 것이다. 재미있게도 그 할아버지는 심하게 코를 골아서 같은 도미토리를 쓰는 모든 사람이 질색했을 정도였다. 한 번도 인사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끼리 아침에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제 누군가 심하게 코 고는 것 들었어?”라고 말을 걸며 심란함을 공유했을 정도다. 바로 그 문제의 범인이 이탈리아 할아버지였는데, 코 고는 것 빼고는 매우 친절하고 예의 바른 분이었고 몇 번 눈인사를 건넨 나에게 가지고 있던 와인 한 병을 주고 떠난 것이다. 나중에 혼자 와인을 따라 마시며 이탈리아 할아버지의 와인 고르는 안목에 감탄했던 기억이다. (물론, 낯선 사람이 주는 개봉한 음료나 음식은 조심하는 것이 낫다)
1인 가구로 꽤 오래 살아온 누군가는, 갑자기 사람들과 말을 하고 싶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울 때면 일부러 전통 시장을 찾는다고 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 한가운데에서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물건값을 깎아도 보고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묻다 보면 그날 하루만큼 필요한 ‘사람과의 부대낌 필수량’을 채울 수 있다고 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외국에서 혼자 오래 여행하다 보면 대화를 할 사람이 없어서 아쉬울 때가 많은데, 호스텔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이렇게 기초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다 보면 그런 욕구가 채워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쓰지 않는 외국 소도시를 여행하면서 하루 종일 현지어로 “예, 아니요, 감사합니다”만 말하다 보면, 호스텔에서 비록 영어로라도 누군가에게 말을 붙여 보고 싶어진다. 어쨌든 해외 호스텔의 공용어는 그 나라 말이 아니라 영어니까.
호스텔에선 매우 가벼워서 심각해지지 않을 만큼의 딱 적당한 연결이 가능하다. 어차피 다들 떠날 사람들이니까 다시 볼 일도 없다. 그래서 눈앞의 누군가를 좀 더 친절하게 대하고 싶어진다. 내가 무미건조하지만 쾌적한 호텔보다 재미있지만 불편한 호스텔을 좋아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