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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어리 Mar 16. 2022

서점 직원이 뇌물이냐고 물었다

다시 봐도 이불킥 감인 편지를 공개합니다

서점에 책이 풀리던 첫 주, 아직 부모님은 출간 소식을 모르고 계셨습니다. 당시에 멀쩡한 아들이 회사 끝나고 배낭에 서류파일을 잔뜩 넣고 서점을 돌아다닐 줄은 꿈에도 모르셨지요. 배낭 속 파일에 들어있는 서류는 가정용 프린터로 손수 인쇄해서 명함과 함께 클립을 끼워 가지런히 정리한 저의 편지입니다. 손글씨 폰트를 사용해서 언뜻 보면 꾹꾹 눌러쓴 것처럼 보이는 이 편지는 서점 직원에게 바치는 저의 마음입니다. 음흉한 욕망을 예의바름으로 감춘 속내라고나 할까요?


가정용 프린터로 인쇄해서 스테이플러로 찍습니다. 명함을 포개어 클립을 끼웁니다. 투명 화일에 담습니다. 헷갈리지 않게 포스트잇으로 지점명을 써둡니다. 명함 그림과 도장은 마스코트.


출간 6일 차에 준비한 서한에 뭐 그리 자랑할 거리가 있을까요. 아직은 이렇다 할 독자 리뷰도 없는 상태입니다. 책이 나오자마자 서평단을 모집하고 초조하게 리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1주 차 신생아 도서를 소개하는 미미한 편지 한 장, 출판사에서 만든 보도자료 한 부, 그 위에 명함을 클립으로 집어서 파일에 넣습니다. 편지는 격식을 차리기 위해 봉투에 넣었습니다. 두 달 동안 많이도 바뀌었지만 처음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ㅇㅇ문고 ㅇㅇ점 담당자님. :)
저는 이번에 동양북스 출판사와 함께 신간 <같이 있고 싶다가도 혼자 있고 싶어>를 펴낸 내성적인 지은이 심정우라고 합니다.

이번에 저의 첫 책이 나와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서가 어딘가에 꽂혀있을 작고 작은 저의 책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책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프렌즈, 실버, 골드, 플래티넘을 넘어 2021년은 물론 2022년에도 프레스티지 등급을 예약한 책 덕후 심정우 드림(평소에 ㅇㅇ점, ㅇㅇ점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시 봐도 눈을 씻고 싶을 정도로 창피합니다. 무엇보다도 담담하고 담백한 척 짧게 줄이려다가 마지막에 4줄이나 덧붙인 자기 PR 멘트가 부끄럽습니다. 저자 소개 편지인데 본인이 누구인지, 책이 어떤 내용인지, 독자 반응이 어떤지는 한 줄도 없이 평소에 여기 서점에서 책 많이 사는 고객임을 어필하는 치졸함이 매우 돋보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첫 번째 영업을 준비하던 이 때로 시간을 되돌려서 편지 내용에 앞서 강조한 세 가지를 꼭 추가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사족은 싹 지우고요. 다행히 이다음 버전부터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습니다.


초보 저자 정어리의 조언 ③
서점 영업용 편지를 준비할 때 들어가야 하는 3가지  : 저자 소개, 책 소개, 독자 반응(★-좋은 피드백은 차곡차곡 모아서 편지 내용에 업데이트합니다.)

※ 저자로 서점을 찾아간 거라면 저자로서의 본인을 소개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평소 구매 실적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모습은 어쩐지 꼴불견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제 책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서점의 우수 고객입니다. (어쩔티비?)


다른 저자들은 이렇게 종이에 편지를 인쇄해서 파일에 끼워서 봉투까지 준비하여 영업을 다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님은 제외합니다. 많은 방법 중에 편지를 준비한 이유는 저에게 허락된 시간은 적은 반면, 서점 직원 분들은 너무나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실전에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인사를 후다닥 하는 찰나의 순간에도 직원 분들의 마음은 급하기 때문이죠.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인사를 드리러 가겠다고 정식으로 약속을 잡기에도 민망했으니까요.


히트 앤 런(Hit and Run), 뼛속까지 내향인인 저는 직원에게 편지를 건넬 때부터 빨리 작별인사를 하고 도망갈 생각을 합니다. 겉으로는 사회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저는 사무직이지 영업직이 아닌걸요. 서점 직원에게 접근할 때 굳이 편지를 봉투에 넣어서 내밀었던 점은 후회스럽습니다. 한 번은 도서 추천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에게 서서 공손히 설명을 드리면서 두 손으로 파일을 내밀었던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제 편지를 받은 그 분은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 안에 든게 뭐죠? 상품권 같은 건가요?"


영화에서 보면 적대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주인공이 다가갈 때 멀리 떨어져서 칼을 내려놓고 양손을 든 상태에서 자신의 손바닥을 보여주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영업용 편지도 굳이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가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후로는 봉투를 빼버리고 파일에 바로 편지 내용이 보이게끔 종이를 끼워서 손가락으로 글을 가리키며 편지라고 처음부터 설명해주었습니다.


A4 용지에 인쇄하든 손바닥 만한 엽서에 짧게 쓰든 중요한 건 진정성과 핵심 포인트입니다. 바쁜 하루 일과 중에 저라는 사람을 만나고 뭐라도 기억에 남으려면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편지를 쓰고 명함을 제작했습니다. 제 책을 주문하면 어떤 점이 서점에 득이 될지도 나름의 논리로 전달해야 하지요. 어느새 영업사원이 되어가는 초보 저자였습니다.


초보 저자 정어리의 조언 ④
서점 직원분한테 편지를 건넬 때는 차라리 봉투를 빼고 내용물이 보이게 드리는 편이 낫습니다. 봉투 안에 돈 아니면 상품권이 들어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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