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길 따라 떠나는 심청
“김동지 댁 큰 아기 너와 나는 동갑으로 담을 사이에 두고 크며 형제같이 정을 두어 백 년이 진토 되어 인간고락 함께 누리자 하였더니, 나 이렇게 떠나가니 그도 또한 한이로다. 앞집 작은 아가. 상침질 수놓기 하려느냐. 작년 오월 단오야에 추천하고 놀던 일을 네가 그저 생각하느냐. 금년 칠월 칠석야에 길쌈과 바느질하겠다고 한 약속도 이젠 허사로구나. 팔자 좋은 너희는 양친 잘 모시고 잘 있거라.”
“해는 없고 어두침침한 구름만 잔뜩이며 꽃은 시들어 제 빛을 잃고 강물도 흐느끼고 두견도 구슬프게 운다. 춘산에 지는 꽃은 지고 싶어 지나 바람에 떨어지니 네 마음이 아니오라. 박명 홍안 나의 신세 저 꽃과 같은지라. 죽고 싶어 죽으랴만 사세부득이니 수원수구(誰怨誰咎)할 것 없다.”
뱃길을 따라 몸을 던지러 가는 중에 심청의 복잡한 심사가 드러난 대목이다. 차례로 또래 친구들을 떠올리며 그들과 대비되는 제 운명에 대한 토로가 애절하다. 장승상 부인에게 답할 때의 결기와는 다른 모습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고 싶은, 한창 피어날 이팔청춘 꽃다운 나이에 춘산에 지는 꽃처럼 세파에 떠밀려 지고 만꽃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팔자 좋은 친구들과 달리 박복한 제 신세에 대한 탄식이 처량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누구도 원망할 것 없다며 애써 마음을 다스리지만 이 고백이야말로 가득 쌓인 원망의 반증 같다.
해는 사라지고 구름만 잔뜩 낀 이곳은 심청의 눈에 비친 도화동의 모습일 터였다. 심청의 심정을 아는 듯 소쩍과 두견과 강물이 함께 구슬프게 운다. 천지만물에 심청의 모든 감정이 투영된다. 몸을 던지러 가는 뱃길 위에서야 비로소 그녀는 제 감정과 조우를 시작하게 된 것일까. 그동안엔 그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 곽 씨 부인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사회집단이 요구해 온 이상적 자녀 상에 부합한 모범 교과서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 오욕칠정의 감정을 지닌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들에게 허락된 감정이란 과할 정도로 넘치는 인정과 자애의 정서일 뿐, 분노와 시샘, 탐욕과 같은 부정적 감정은 애초에 없거나 이미 초월한 듯 그려진다. 태몽이 가리키듯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 마음 씀씀이가 본디부터 달랐던 것일까? - 하늘에서 내려온 특별한 존재로 너와는 다른 격을 지닌 존재이니 함부로 네 감정을 투사치 말라. 쏘아대는 한 무리의 소리가 들린다. 마치 자신 역시 나와 같은 부정적 관점을 가진 부류와는 마음의 결이 다르다는 듯이. 과연 그럴까? -
태몽대로라면 심청은 서왕모의 딸이다. 분노와 파괴의 신이자 죽음의 신인 동시에 불사약을 전해주는 영원한 생명력의 화신이기도 했던 서왕모. 그러나 그녀의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인 여신의 모습은 가부장적 유가의 통치체제가 확고부동으로 자리 잡으면서 아름답고 자애로운 여성신으로만 그 이미지가 제한되어 간다. 체제가 원하는 여성상을 여신의 이미지에 투영하고, 이를 내면화하도록 요구해 온 것이다. 모녀 역시 시대가 요구한 아내상과 자녀상을 철저히 내면화한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은 연이어 죽음을 맞는다. 사회의 요구를 충실히 따른 결과가 죽음이라면 당대를 지배한 집단윤리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서왕모가 유가의 통치체제를 확립한 한무제에게 당신이 정 情을 막아 생명력의 상징인 불사약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 말을 기억해보자. 서왕모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자신의 입맛대로 재단하고 원하는 측면만을 미화해 온 유가의 통치질서가 자연의 본성. 도와 멀어졌다는 반증 아닐까. 본능과 정서를 지나치게 억압하고 인위의 도덕규범을 강조한 결과가 개인과 집단의 생명력을 고갈시킨 근본원인 아니었을까. 신화적 성격을 띤 개인의 운명은 집단의 운명과 뗄 수 없는 관계이기에 그렇다.
이제 개인사적 내력으로 돌아가 다시 묻자. 왜 하필 심청이 이 운명을 떠안게 된 주인공이 된 것일까? 그녀는 자신도 살고 싶은 꽃임을 좀 더 분명하고 솔직하게 토로하지 못했을까.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을, 부조리로 가득 찬 세계에 대한 제 정당한 분노를, 잘못된 인습에 반항하는 사춘기 아이들처럼 아버지와 맞서 개기는 방식이 아닌, 인당수에 제 목숨을 던지는 극단의 방식으로 몰고 가게 된 것일까. 선택의 조건조차 허락되지 못한 환경에 체념적으로 순응한 것일까 아니면 가장 극렬한 방식의 투쟁일까.
아이는 생후 3년을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해도 안전하다는 경혐을 충분히 누림으로써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심청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고아나 다름없이 자란 아이다. 온정이 넘치는 마을이라고 하나 젖동냥으로 자란 아이다. 젖동냥 시절부터 눈칫밥 먹는 환경에 익숙해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비로부터 눈만 뜨면 충효에 관한 이상화된 성현들의 이야기만 들어온 아이다. 덕분에 예닐곱 이른 나이부터 아버지를 조석으로 봉양하겠다고 자처한 아이다. 그런 아이가 부모로부터 무조건적인 지지를 온전히 받아 본 적 있을까.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 본 경험이 없다면 조건 없는 사랑과 자애가 무엇인지 온전히 알기도 어렵다. 인의와 효, 그것은 약한 아이가 살아남기 위해 제 쓸모를 입증하는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승에 가서라도 부인의 은혜를 갚겠다고 한 심청이다. 타인의 조건 없는 애정과 지지도 그녀는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길러 준 아버지에게 효를 다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부인의 애정과 지지도 갚아야 할 채무라 여겨진다면 그녀에게 삶이란 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걷는 형벌 같은 것 아니었을까. 당위의 도덕과 의무에 짓눌려 있는 그녀가 존재의 자유와 기쁨을 온전히 누려 본 적 있을까.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건 열다섯 꽃다운 나이였다.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이자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세상이 정해 놓은 윤리적 규범들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반항기다. 바깥세상에 눈을 뜨며 걱정 없이 뛰어노는 친구들과 비교되는 궁핍한 제 신세가 차량도 할 나이다. 모범이 될만한 옛 성현들에 관한 글을 읽어주던 아버지. 그를 믿으며 반듯하게 살아가려 노력했을 아이. 심청은 당위와 의무의 무게에 짓눌려 삶의 기쁨과 자유가 무엇인지조차 몰랐으리라. 그런데 아버지가 덜컥 철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공양미 삼백석만 있으면 눈을 뜬단다.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 자책하면서도 이를 굳이 내게 토로하는 이유가 뭔가. 자신은 아버지께 배운 대로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었지만, 정작 믿고 자란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가. 나약하고 무기력한 데다 심지어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지 않은가. 사람의 도리란 무엇인가. 왜 자녀의 도만 있고 아비의 도는 보이지 않는가. 그래도 혈육이라 믿고 의지해 온 아버지다. 봉양으로 힘들 때도 있지만 아버지 곁을 지키는 것이 도리라 여기며 자신은 자상한 부인의 수양딸이 되는 것도 거절했다. 내심엔 부잣집 쌀밥보다 익숙한 내 집 꽁보리밥이 더 낫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삼백석이라니, 눈을 뜨기만 한다면 내 고통 따위는 안중에 없는 것인가 순간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은 심정 아니었을까. 심봉사 입장에서야 부인의 수양딸이 된다면 심청을 위해 좋을 것이라 여겼다 해도 심청 입장에선 뱃사람에게 팔려가나 부인의 수양딸이 되는 것이나 어른들 사이의 필영에 의해 거래되는 대상일 뿐인 건 매 한 가지라 여겨졌을지 모른다.
인륜과 도리에 관한 도덕규범을 금과옥조처럼 믿고, 이에 대한 인정과 쓸모로 자신을 증명해 온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어땠을까. 믿고 따라온 이상적 법도와 현실 사이의 괴리. 선의의 배려 뒤에 감춰진 음침한 뒷거래. 그 속에서 자신은 언제든 필요에 의해 사고파는 거래의 대상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자신에게 인륜과 도리를 가르친 자들의 행태, 부조리로 가득 찬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믿어온 가치에 대한 불신이 내면을 압도하지 않았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혼돈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이 세계를 떠나버리는 것이 유일한 답처럼 여겼을지 모른다. 입바른 소리만 해댈 뿐 정작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는 어른들 앞에서 보란 듯이 자신을 던져버림으로써 충효를 앞세워 저보다 약한 것을 희생양 삼는 당신들의 가증스러운 위선을 고발하겠노라. 당신들이 내게 가르쳐 온 것들이 모두 헛소리고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 몸으로 증명하고 말리라. 본능을 지나치게 억압해 온 만큼 켜켜이 쌓여 온 내면의 분노가 사춘기를 거치며 자기 파괴 형태로 드러난 것인지 모른다고. 부인은 그녀를 무정하고 독하다 했다. 심청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인정에 얽매였으면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의 행위가 아버지에게 상처를 줄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입은 상처만큼 당신도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고. 당신의 게걸스러운 욕망의 결괏값이 바로 내 죽음이라고. 그렇게 제 아버지와 이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부끄럽게 사느니 죽는 편이 차라리 더 옳은 편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그것이 효를 행하는 동시에 효를 부정하는 모순과 역설을 낳게 한 동인이었을 것이다. 죽음과 파괴의 신 서왕모의 딸답게 말이다.
도화동은 인정이 넘치는 무릉도원 같은 곳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은 인간사의 내밀한 폭력이 은폐되어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거룩한 종교는 기적을 미끼로 사기행각을 벌였고, 신에게 바치는 공양은 사람장사하는 인신매매로 변질되었으며, 충효를 앞세운 인륜지도는 약자를 희생제물로 삼는 가부장적 지배구조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마치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뿐인 마을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연쇄 살인이 벌어지는 미스터리 스릴러물을 연상시킨다고 해야 할까.
심청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이곳에 내려왔다고 했다. 옥진선녀(곽 씨 부인 분)와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복숭아를 바치러 가는 임무를 잊고 만 것이 그녀의 죄란다. 그렇다면 천상에서 지나치게 정을 나눈 죄로 지상에선 본능과 감정을 억압하고 당위적 윤리가 강조된 조건 속에 살아야만 했던 것일까. 그녀가 죗값을 모두 치르고, 지상에 복숭아를 바치는 임무를 완성하러 왔다면 그녀는 임무는 완성한 것일까.
예로부터 복숭아는 여성의 가슴, 풍만한 엉덩이, 출산을 연상시키며 생명력을 지닌 신비의 여성성을 상징해 왔다. 태몽대로 복숭아를 바치러 지상에 내려온 임무를 완수했다면 그녀는 생명의 활기를 잃은 도화동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녀는 죽었다. 죽은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도화동을 살려내었다는 것일까. 앞으로 펼쳐질 심청의 부활 스토리를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까.
융은 말했다. 낡은 인생관의 붕괴 없이 새로운 창조는 없다고. 죽음과 파괴의 신인 동시에 생명 창조의 힘을 지닌 서왕모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없다면 새로운 심청은 태어날 수도 없으리라. 심청이 다시 살아났다면 그녀는 이제 이전의 심청일 수 없다. 새롭게 변환된 자아의 탄생이 거기 있어야만 한다. 그녀의 죽음을 부모를 위한 효심이라는 당대의 인습에만 가둬 둘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다. 그녀는 강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살아 돌아왔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이한 스토리의 배후엔 과연 어떤 속뜻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