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좋은 징조라는 꿈의 역설
심봉사, 꽃수레 타고 가는 심청을 꿈꾸다.
심봉사는 심청으로부터 장승상 부인의 수양딸이 되기로 했고, 부인이 대신 공양미삼백석을 내어 주기로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심청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여긴다. 어쩌면 그는 오래전부터 이를 예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장승상 부인 댁을 드나들던 심청을 기다리다 개울에 빠진 것을 기억하자. - 심봉사가 개울에 빠진 시각은 심청이 장승상 부인에게 수양딸 삼고 싶다는 말을 들었던 시각이기도 했다.- 심봉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허둥대다 덜컥 몽운스님에게 공양미 삼백석을 시주하겠다고 약속하고 만 것은 머지않아 혼자 남겨지게 될 것이라는 공포에서 비롯된 절실한 추동이었으리라. 눈만 뜨면 더는 심청을 고생시키지 않을 수도 있고, 심청이 혹 떠나더라도 홀로 자립해 살아갈 수 있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비록 덜컥 시주를 약조하고 이를 발설해 딸자식의 마음에 짐을 안겨준 어리석은 짓으로 이어졌으나 종종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 이성보다 센 무의식, 본능과 감정의 힘 아니던가. 그는 자신의 철없는 행동이 심청을 장승상 부인에게 보내야 하는 결과를 불러들였지만 앞 못 보는 아비 봉양하느라 고생한 딸에겐 좋은 일일 터이고, 시주문제도 자동으로 해결되니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으리라.
심청이 떠나기 전날, 그는 청이 꽃수레에 타고 어딘가로 실려가는 꿈을 꾼다. 장승상 부인 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그의 기대가 낳은 꿈이었을까. 그는 이를 좋은 징조라고 여긴다. 어미 없이 자라며 고생한 딸에게 아비로서 미안한 마음도, 시주문제로 딸에게 지운 짐에 대한 자신의 죗값도 상쇄할 수 있을 꿈이라 여겼으리라. 그러나 그날, 정작 그가 마주한 현실은 딸 심청이 인당수에 바쳐질 제물로 뱃사람들에게 팔려간다는 소식이었다. 좋은 징조라 여긴 자신의 꿈에 무참히 배반당하고 만 것이다. 부인과 한날한시 태몽을 꾸고, 원하던 자식은 얻었으나 의지하던 아내를 잃었듯, 좋은 징조라 여긴 꽃수레는 딸을 제물로 바치는 배가 되어 돌아왔다. 왜 그가 믿은 좋은 징조는 번번이 불행을 몰고 올까. 되풀이되는 이 비극은 우연일까. 필연적 귀결일까.
훗날 심청이 꽃수레에 실려 황후가 되어 돌아오고 그도 결국 눈을 떴으니 결과적으로 기막히게 들어맞은 꿈이요, 해몽 아니냐고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틀렸더라도 결과적으로 맞으니 정답이라는 어떤’ 경우를 ‘모든’으로 서둘러 둔갑시켜 버리는 결과론적 해석. 혹 그것이 장님 문고리 잡는 격의 어리석음을 자초하게 하는 주범은 아닐까. 대책 없는 긍정과 환상만을 키우며 이에 이르는 여정의 길고 어두운 터널에 대해 눈 감게 한 것은 아니냐 묻고 싶은 것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고 믿는 이 놀라운 재주가 비극을 되풀이하는 주범 아닌지. 고진감래 苦盡甘來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고진苦盡의 되풀이를 자초한 어리석음을 먼저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출발은 아닌지.
덧. 수상한 날들...
좋은 징조라는 예견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자신이 그려온 꿈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그 자신을 해체하고 마는 역설의 순간에 놓인 한 인간의 운명을 본다. 수면위로 드러난 집단 욕망의 민낯도 함께 본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길고 지루한 반복이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발가벗기며 한 시대를 매듭짓게 할지도 모른다. 저 광기는 그저 한 개인의 것만 같지 않다. 집단 무의식이 오랫동안 함께 칼춤을 추고 있는 현장인 것만 같다. 특정 집단의 광기가 낳은 파괴와 창조의 갈림길 앞에서 옛 사림들이 운명 혹은 기적이라 불러 온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오래되고 기이한 신비. 그것은 우리의 운명을 어디로 데려갈까. 아니 우리는 이 어수선한 혼돈을 뚫고 정확히 어디로 나아가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