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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심청 사건의 진범을 추적하라.

by 지크보크

“우리가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는 한 그것은 실재의 그림자가 몸에 속해 있는 것처럼 우리의 자아에 속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의식에 저장되어 자신의 그림자를 악마와 같은 형태로 만나거나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외부의 타자에게 투사한다. ” - 바바라 한나. 융심리학과 내면여행에서


“눈을 팔아 너를 살지언정 너를 팔아 눈을 산들 그 눈을 해서 무엇하겠느냐. 어떤 놈의 팔자라서 아내 잃고 자식 잃고 사궁지수된단 말인가.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 네 이놈 선인들아, 아무리 장사가 좋다 한들 사람 사다 제사하는 걸 어디서 보았느냐? 하나님의 어지심과 귀신의 밝은 마음 영화가 없을쏘냐... 중략... 이 독한 상놈들아. 옛일을 모르느냐 칠 년 대한 가물 적에 사람 잡아 빌려하니 탕임금 어진 마음 ‘내가 지금 비는 바는 백성을 위함이라 사람 죽여 빌 양이면 내 몸으로 대신하리라’ 하고 몸으로 희생된 그런 일도 있었느니라. 차라리 내 몸 대신 가면 어떠하냐 차라리 날 죽여라. 평생에 맺힌 마음 죽기가 원이로다. 이 무지한 강도 놈들아.”


딸 심청이 뱃사람에게 팔려간다는 사실을 알고, 심봉사 울부짖는 장면이다. 자식이 제물로 바쳐지는 상황을 바라봐야 하는 그 심정이 오죽할까. 더군다나 제 욕망이 나은 처참한 결과 아닌가. 자식 팔아 눈을 뜨고 싶지 않으니 대신 자신을 데려가라는 그의 절규가 아프게 전해온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뱃사람들의 어리석은 풍습과 사람 사고파는 일을 당연시하는 장사치들에 대한 그의 분노에서 당시 세태에 대한 그의 절망스러운 심정을, 동시에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함께 읽는다. 오늘은 차마 그를 자식 판 아비라고 비난하지 못하겠다. 적어도 그는 자식 팔아 제 영화누리 기를 당연시하는 파렴치범은 아니었다. 장사치의 물정과 계산만 남은 채, 인의나 인륜은 무능한 자의 헛소리로 치부되는 세상에 그래도 품어야 할 가치의 우선순위는 사람 아니냐고 항변하고 있지 않은가. 평생 죽기가 원이었다는 그의 말이 아프게 들린다. 자신이 믿어 온 유교적 이상과 괴리된 현실 사이에서 오랫동안 우울에 시달리며 이 지옥 같은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테니까. 그 역시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위계 구조 아래 힘없이 밀려난 사회구조의 희생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뱃사람들을 무지한 강도라고 비난하지만 그는 그 무지로부터 자유로운가.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처녀를 바쳐야 한다고 믿는 뱃사람들의 신앙이나 눈을 뜨는 일이 공양미 삼백석으로 가능하다는 몽운승이나 이를 믿고 덥석 시주하겠다고 장담해 결국 딸을 팔아넘긴 꼴이 되어버린 그나 치성을 물질로 치환하고 있는 물신주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 또한 자력이 아닌 타력에 기대어 구제받을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이 곧 이 모든 비극의 원인 아닌가.

사실 작품을 읽다 보면 모두 섬뜩할 정도로 선한 얼굴을 하고 있다. 뱃사람도, 화주승도, 심봉사도, 각각의 선의를 지닌 우리와 다름없는 평범한 인간들이다. 뱃사람들은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심청의 효심에 감동해 제물값도 두 배로 후하게 쳐준다. 화주승도 그렇다. 가엾은 심봉사를 위해 비책을 가르쳐주었을 뿐이다. 게다가 상대의 형편을 진심으로 걱정해 준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알리바이가 있다. 누구도 심청에게 제물이 되라 강요한 적 없다. 죽은 자는 있으나 죽인 자는 없는 셈이다. 각자가 믿는 신앙체계와 밥벌이해 온 삶의 자리가 심청의 죽음으로 귀결되었을 뿐. 봉건적 위계구조가 자신을 지켜 줄 어미도 없이 가난하고 무능한 봉사의 딸로 태어나 아비를 돌봐야 하는 처지에 내몰린, 시스템의 가장 하층부의 약자인 심청의 죽음을 낳은 것일 뿐.


죽은 자가 있다면 죽인 자가 있어야 한다. 누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리게 했는가. 선의에 가려진 베일을 벗겨보자. 심청을 바다에 빠뜨린 뱃사람은 용왕?한테 뒷돈을 듬뿍 받았을지 모른다. 값을 후하게 쳐준 것도 갑절의 이익을 얻고 생색을 내고 있는지도. 아니 생명값을 후하게 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뱃사람들이 사람을 산다는 소식을 심청에게 알려 준 유모 귀덕어미 역시 의심스럽다. 어쩌면 뱃사람으로부터 소개비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심청을 팔고 심봉사 돈을 가로챌 엉큼한 계산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억측의 근거는 후에 차차 밝히겠다.- 공양미 삼백석을 운운한 몽운사 화주승은 절을 멋지게 증축하는데 꽤 많은 돈을 투자했을 터이니 영험한 이적을 미끼로라도 투자비를 회수하려 한 것일지도, 이를 믿고 덜컥 시주를 약속한 어리석은 심봉사 또한 눈을 뜨고 싶은 욕망에 눈이 멀어 효녀로 키워 온 딸을 수렁에 빠지게 한 것이라고. 시주를 대신 내고 심청을 구하려 한 장승상 부인마저도 말 잘 듣는 착한 심청을 양녀로 삼아 남은 여생 돌봄 서비스를 잘 받고자 한 본능적 셈법이 작동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모두 심청을 제물로 삼는데 동조한 것 아니냐고. 효라는 가치를 명분 삼아 가부장적 권위와 위계질서의 시스템을 공고히 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각자가 자신보다 약한 대상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삼으며 그들의 고통을 외면해 온 것 아니냐고. 그럼에도 모두가 자신의 선의만을 기억하며 뒤에 숨은 자기 그림자를 인식하는 일에 눈이 어두웠던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충이라거나 효라는 가치 뒤에 숨은 위계의 그늘을 보지 못하면 우리 자신도 심청과 같은 희생양이 되거나 타인을 희생양 삼는 욕망의 변증법을 되풀이하게 될 자도 모른다고. 심청은 우여곡절 끝에 바쳐진 특별한 한 개인의 목숨이 아니다. 당대, 그리고 지금도 이 사회구조 아래 희생당한 모든 약자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일 수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교과서식 결론은 그것이 아버지를 위한 효심이라 했다. 천상의 선녀였던 착한 심청의 자발적 선택이라고. 하늘도 그녀의 효심에 감동했다나. 심지어 그녀는 살아 돌아온다. 후에 황후가 되고 아비도 눈을 뜨니 해피엔딩이란다. 고진감래란다. 그러니 그 말 믿고 모두 심청이처럼 부단히 고진苦津해야 할까?

심청스토리가 해피엔딩이라는데 동의할 수도 없고 동의하고 싶지도 않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의 것이다. 살아남은 자가 과거를 재편집하는 여정이 곧 이야기다. 그렇다면 거기 숨은 비극적 귀결의 인과를 밝히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죄를 모른 채 살아간다면 비극은 되풀이되고 결국 우리의 생은 운명의 헛바퀴만 돌리고 죽는 진화 없는 도돌이표에 다름 아닐 테니까.


솔직히 바다에 빠져 죽은 심청이 무슨 수로 살아 돌아오나. 죽은 심청이 용궁에 가고 옥황상제를 만나고 연꽃에 실려 살아 돌아오고 황후가 되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다니. 그것이 정말 심청의 지극한 효심 때문이라면 이 땅의 아버지는 여전히 반성할 필요 없고, 딸들은 여전히 심청이처럼 실기를 강요당할 수 있지 않을까. 이토록 비현실적 스토리가 민주시민이라 믿으며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현재의 비극을 심리적으로 치환하여 희망 회로를 그려내고 이로부터 위로받고자 하는 것일까. 황후가 된 심청이라는 신데렐라이야기 같은 해피엔딩의 결말을 기대하면서? 설령 누군가는 운 좋게 해피엔딩으로 귀결되었다 한들 그는 결국 사회구조를 공고히 하는 욕망의 변증법에 참여하는 꼴 아닌가. 개천에서 난 용들이 더 개천에 갑질하는 이유가 거기 있으리라. 해봐서 아는데 그러니까 너도 고진苦津에 매진하라며 타인에게 고통을 떠넘기는 일을 정당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고전이라면 지금 나를, 내 삶의 조건들을 건강하게 변화시켜 줄 해답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따져 봐야겠다. 이야기가 혹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가를 그렇지 않다면 폐기처분하기로 작정하고.

- 지금도 매일 아이들이 죽어간다. 바다에 빠져 죽은 아이들이 있고 골목길에서 압사당한 아이들이 있다. 왜 하필 이 땅엔 유독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 것일까. 그것이 그저 우연이기만 할까. 왜 묻지 않는가. 도대체 이 사건의 진범은 누구냐고.? 그리고 묻자.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느냐고. 그것이 정말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한가. 판타지가 아닌 현실에 실재하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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