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속 비행기 타기

미국에서 아이와 함께 한국행

by Iris Seok

최근 아들과 함께 친정에 5주간 다녀왔다. 코로나19 사태 속에 미국에 사는 내가 한국 친정에 방문하는 일을 결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 4월1일부터 시행된 ‘2주 격리’를 필수로 전제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다섯 살인 어린 아들을 데리고 위험천만한 비행을 견뎌야만 했으니까.


하지만…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한국에 가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던 때였다. 코로나19 사태로 집에 갇혀 일과 육아를 한지 어느덧 3개월 차. 삶을 바라보던 나의 긍정적인 시선이 조금씩 고갈되고 있음을 느꼈다. 타향살이를 하며 마음 한 편에는 늘 향수의 감정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향수가 심했다.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 중이었고, 그 이야기는 한국에서도 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지난 3년간 얼마 되지 않은 휴가일 탓에 늘 쫓기듯 일주일~2주일 기간으로만 한국에 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5주간 한국행이 가능했다. 것도 휴가를 쓰지 않고서! 이 꿈같은 기회를 도저히 날려버릴 수 없었고, 남편과 오랜 대화 끝에 나와 첫째 아들 둘이서만 한국에 다녀오기로 했다.




출발 당일 새벽까지 짐을 싸면서도 ‘내가 정말 한국에 가는게 맞나’ 싶을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오래도록 집에 갇혀있던 터라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가는 일이 더욱 더 믿기지 않았다. 한동안 장보는 것 이외의 모든 외출을 금하며 살았는데, 공항이라니…장시간 비행이라니…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아들은 아침부터 뭐가 신났는지 싱글벙글이었다. 말을 안 들으면 ‘너 한국에 안 데려간다!’ 엄포를 놨다. 그러면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엄마의 말에 순종하는 착한 아이 모드로 태세를 전환했다. 저 어린 게 뭘 안다고, 한국에 가고 싶은 걸까. 저도 집에서 일하는 엄마 아래에서 하루 온종일 TV만 보며 보내는 나날이 힘들었을테지.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한국에 가게 된 까닭의 40% 지분은 집에만 갇혀 있는 아들에게 바깥 세상을 선사해주고 싶다는 마음도 컸다.



무슨 정신으로 짐을 챙겼는지도 모르겠다. 되는 대로 챙겨 넣고, ‘두고 온 게 있으면 한국에서 해결한다’라는 마음가짐으로 공항을 향했다. 공항 주차장에 도착하자 긴장감이 극심하게 올라왔다. 흡사 전투를 벌이러 가는 전사의 마음이었다 해도 과장은 아니리라.



앞서 한국을 다녀온 친구들의 후기담을 참고해 손에 비닐 장갑 두개를 끼워 넣었다. 한 친구는 무언가를 만질 때마다 바이러스가 묻었다는 생각으로 수시로 장갑을 바꿔줘야 한다고 했다. 특히 공항 검색대를 통과해서 한 번 바꾸고, 비행기에 타서 바꿔 끼고,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장갑을 바꿔 끼라고 했다. 방호복을 입고 비행기에 타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과장스러울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친구 조언에 동의해 그대로 따랐다.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하고, 페이셜 쉴드까지 착용했다. 숨이 차 올랐다. 이대로 장장 20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해봐야지. 한국행을 택한 만큼 내가 감당해야할 일이었다.

문제는 고작 다섯살 된 아들…이 아이가 견뎌줄 수 있을까. 우선 아이에게도 나와 똑같이 장갑, 마스크, 페이셜 쉴드를 착용시켰다. 이후 유모차에 태운 후 유모차를 비닐로 감쌌다. 이 정도라면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할테다.



유모차와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LAX공항은 생각보다 한산하지 않았다. 제 나라로 돌아가려는 인파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많은 (그러나 평소보다는 적은) 사람들이 공항에 있었다. 대부분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고, 일부는 방호복을 입고 있기도 했다.


티켓팅을 마치고, 데려다 준 남편과 굿바이 인사를 했다. 남편과 헤어지고 나니 더욱 비장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5살 아들을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무사히 지켜내 건강하게 한국에 도착하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LAX 공항 내 면세점, 항공사 라운지 등은 운영이 중단된 상태였고, 일부 식당과 스타벅스만이 ‘테이크 아웃’으로만 운영되고 있었다. 비행기 탑승 직전에 탑승구에서 공항 직원에 의해 비접촉 발열검사가 이뤄졌는데, 이때 37.5도 이상 고열을 보이게 되면 탑승이 불가했다.



아들은 낯선 승무원이 발열검사를 시도하자 무슨 병원 치료를 받는 것으로 오인을 했는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이윽고 잘 쓰고 있던 마스크까지 벗어 던지고 땅바닥에 누워 오열했다.



‘망했다…’라는 심정. 식은땀이 났다. 아들을 재빨리 안아 사람들이 없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들을 달래기 위해 온갖 말들을 늘어놓았다. 쉽게 진정되지 않는 아들…비행기에 타면 초콜렛을 주겠노라 달래고 달래 겨우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온몸의 기운이 다 빠졌다. 무사히 첫번째 관문은 통과한 느낌. 혹시 몰라 챙겨온 빼빼로를 맛있게 먹으며 아들은 ‘겨울왕국’을 시청 중이었다. 휴, 이제 12시간에 달하는 비행 시간만 견디면 한국이다. 마스크로 인해 여전히 호흡은 불편했지만 그래도 생존을 향한 의지 덕분인지 그럭저럭 참을만 했다.


승무원들은 ▲건강상태 질문서 ▲특별검역신고서를 나눠줬다. 해당 서식지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증상이 있는지 여부, 최근 21일간 방문한 국가명 등에 대한 질문이 쓰여있다.



비행기에서 계속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고, 바이러스 노출 위험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식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 과일 몇 점 집어 먹는 게 전부였다. 아들에게도 빵 안쪽으로만 뜯어 줬다. 식사를 하는 손님과 식사를 하지 않는 손님이 반반씩 있었다.





인천공항에 도착. 무사히 내 나라에 도착했다는 감격도 잠시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아이를 다시 유모차에 태우고 앞서 작성한 서식지들을 제출하기 위해 줄을 섰다. 이때 다시 한 번 발열 검사가 시행됐는데, 아이가 또다시 아까처럼 자지러질까봐 검사관에게 아이를 안고 뒷목의 열을 측정해 달라 부탁드렸다. 아이와 나 모두 체온이 37.5도 이하로 확인돼 무증상자로 분류됐다. 만약 체온이 37.5도 이상이었더라면 공항 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진단검사를 받아야했다.

이후 미국에서 미리 다운받아온 ‘자가격리자 안전보호’ 어플리케이션을 인증받았다 (ID: CORONA). 검역대 통과를 위해 줄을 서는 동안 추가적으로 격리통지서 수령증* 또한 작성해야 했다. (*해당 통지서는 총 2면으로 이뤄져 있고, 1면에는 성명, 생년월일, 여권번호, 입국일자, 주소 등을 적고, 2면에는 격리장소(자가, 시설, 병원) 및 주소 등을 기입한다. 이때 무증상자일 경우 내국인과 장기체류 외국인은 본인 거주지에서, 거주지가 없는 단기체류 외국인은 임시시설에서 14일간 격리 생활을 하게 된다. 자가격리를 위한 거주지가 없거나 적절치 않은 경우 국가(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한 자가 격리 장소(주로 체류 지역 내 호텔)에서 본인 부담 1일 10만원으로 14일간 자가 격리 해야한다.)



한국의 검역은 듣던 대로 까다로웠고,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이 과정에서 난 지칠 대로 지쳤고, 마지막에는 호흡곤란까지 왔다. 아들은 비닐로 덮인 유모차 안에서 축 늘어져 있었는데, 아들이 버텨준 게 그나마 날 위로했다. 무사히 공항을 빠져나와 해외 입국자만이 탑승 가능한 택시에 탑승했다. 앞 좌석에 앉은 기사님과 뒷좌석에 앉은 우리 사이에 비닐 가림막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 2시간 쯤 달려 양평에 도착. 아들과 내가 오붓하게 2주간 지내게 될 부모님의 시골집. 양평에 도착하니 어느덧 밤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시골인 만큼 깜깜한 어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날은 비까지 내렸다. 택시 기사님이 무사히 이곳까지 우리를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마스크를 쓴 채 집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택시에서 내려 엄마, 아빠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나와 아들은 무사히 잘 왔다고…죽을 것 같다고…토로했다. 엄마는 집 안에 순두부 찌개와 아들이 먹을 미역국이 있으니 잘 챙겨 먹으라고 했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살았다’ 싶었다. 하, 난 안전하게 한국에 온 것이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부모님은 창 밖에서 우리 모습을 구경했다. 오랜만에 만난 딸과 손주가 무척이나 반가우셨을텐데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격리가 필수였기 때문에 우리와 접촉은 불가했다. 엄마 아빠와 창 하나를 두고 큰 소리로 대화하며, 이곳이 한국임을 느꼈다.



나와 아들은 그렇게 한국에 도착했다. 인생에서 두 번은 못할 경험이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해 볼지도 모르겠다. 그 어려움 끝에 오는 달콤함이 너무도 달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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