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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지 Nov 01. 2020

9. 나는 왜 그토록 조급했을까

“책 쓴다며, 다 쓴 거야? 책은 언제 나와?”  


내가 책을 쓰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이 말로 인사를 대신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직...’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기 일쑤였고 황급히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곤 했다. 매번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직 첫 책도 완성하지 못한 나 자신이 몹시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였나보다. 나도 모르게 나를 자꾸만 숨기려고 했던 건.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게 됐는데 아마도 이 초라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나는 이 초라함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럽고 싫었다. 내 안에서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초라함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멋진 책을 완성해야만 했다. 더 이상 사람들이 나를 실패자로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당당히 꿈을 이루고 보란 듯이 작가로 성공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서고 싶었다. 나도 언제나 실패만 하는 건 아니라는 걸 하루빨리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지금까지의 반복된 실패를 이번 기회에 제대로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게다가 이번에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꿈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부푼 꿈을 안은 만큼, 이건 진짜 내 꿈이었기에, 나는 전보다 훨씬 더 잘 해내고 싶었다. 어서 좋은 작품을 완성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세상 많은 사람들의 내 책을 읽게 되기를 너무나도 바랐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도 내 조급함에 큰 몫을 했다. 그동안 계속해서 실패만 하느라 통장의 잔고는 바닥난 지 오래였고 빚은 하염없이 늘어만 가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가족들에게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나는 어서 작가로 데뷔해 성공해야만 했다. 정말이지 나는 너무나 간절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내 간절한 바람은 온통 부담감으로만 돌아오곤 했다. 다시 처음부터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부담감. 이번에는 제대로 성공해야만 한다는 증명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 나는 온갖 종류의 부담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내게 근황을 물어올 때마다, 부모님 뵐 때마다, 나는 늘 작아지고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초라함을 없애고 당당하고 멋진 존재로 보이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초조하고 조급해지곤 했다. 조급할수록 지름길만을 찾으며 억지로 애쓰게 됐고, 나는 또다시 지쳐버리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린 것처럼.   






내가 느끼는 이 초라함의 근본적인 원인이 내 안에 잠재된 본능적인 인정 욕구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심리학, 그중에서도 진화심리학 서적을 몇 권 읽고 나서였다.


진화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본능적으로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큰 규모의 집단생활을 하는 종이어서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이 생존과 번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한다. 그렇기에 이왕이면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게 중요하고, 그걸 본능적으로 중요하게 느끼는 쪽으로 진화해왔다는 게 진화심리학의 요지였다. 그러니까 우리 본능 안에 타인에 대한 인정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이 인정 욕구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본능이기에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경우 초라함이나 열패감, 급기야는 분노 등 다양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행동을 통해 인정 욕구를 채우도록 노력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아직 내세울 게 없어 인정 욕구를 전혀 채우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그만큼 더 큰 초라함과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히려 전보다 큰 부담감을 느끼며 초조하고 조급했던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조급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늘 초조함 속에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빨리 성공하고 싶어서라기엔 내가 느꼈던 존재감의 위태로움의 두려움은 어떻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항상 더 나은 나, 더 멋진 내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늘 초조하고 불안했었다. 성공한 나, 괜찮은 나로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를 더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들곤 했다. 그 때문에 이제껏 내가 아닌 모습으로 그토록 애쓰고 노력해왔던 게 아닌가. 그런데 이 조급함의 원인이 인정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초라함을 메꾸려는 마음이었다니. 이제야 지난날의 내가 왜 그토록 애를 쓰며 살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난 내 모습을 돌아보니 글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내 모든 행동에 엄청난 조급함이 담겨 있었다. 특히나 일을 할 때를 떠올려 보면 나는 그저 열심히 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면에는 조금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한가득 안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일을 잘했고 성과도 매우 좋은 편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무언가에 쫓기듯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늘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밤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거나 업무에 도움이 되는 책이나 자료를 찾아보곤 했었다. 그리고 나면 주말에는 늘 녹초가 되어 하루 종일 잠만 자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런 행동들의 원인이 초라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라니. 아무리 본능이라지만 그렇게까지 인정받는 게 중요한 일이었을까, 왠지 허탈해졌다.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내 기억 속의 난 무엇이든 빨리 해내려 애쓰는 아이였다. 초라함을 가리기 위해 늘 뭐든 잘하는 아이가 되자고 마음먹었던 걸까. 나는 언제나 잘 해내려 애썼고, 남들보다 빨리 해내서 주목받고 인정받고 싶어 했었다. 빨리 잘 해내면 칭찬받았던 기억이 난다.  


으레 십 대 청소년들이 그렇듯 나는 타고난 외모나 성격 탓에 친구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는 몇몇 친구들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그들에게로 향하는 시선과 관심이 나에게도 그대로 쏟아지길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이돌 같은 외모나 타고난 말재주 같은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운동과 공부. 이 두 가지라면 내 노력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인정받고 싶었고, 언제나 누구에게든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학교에서는 잘 해낼수록, 이왕이면 빨리 해낼수록,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무엇이든 1등을 하는 게 가장 좋았다. 공부든 운동이든. 하지만 매번 1등을 할 수는 없었다. 언제나 나보다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뭐든지 빨리 해내는 데 집착하고 있었다. 이왕이면 빨리 해내는 게 좋을뿐더러, 남들보다 빨리 해내야만 내가 더 인정받고 사람들이 내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일 거라 믿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나는 체육대회가 싫었다.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고 꽤 잘 달리는 편이었는데, 그렇다고 독보적으로 빠르진 않았다. 아무리 죽어라고 달려도 언제나 1등은 다른 친구의 몫이었는데, 달리기 시합이 끝나면 모두들 그 친구 주변으로 모여 응원을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럴 때면 나는 운동장 어딘가에 혼자서 시무룩하게 주저앉아 있곤 했다. 나를 돋보이게 하지 못한다면 노력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 뒤로 달리기에 흥미를 잃었다.


대신 공부에 온 힘을 쏟았다. 공부와 나는 늘 애증의 관계였다. 시험을 위한 공부가 정말이지 싫었지만 그래도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면에서 달리기보다는 나았다. 시험을 치른 뒤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을 때의 부모님과 선생님의 칭찬과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우러러봄의 시선이 특히나 좋았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행동의 결과를 통해 인정받는 느낌에 중독되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늘 1등을 추켜세우는 까닭에 나는 어떻게 해서든 1등이 되기 위해, 이왕이면 빨리 해내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곤 했다. 그때의 난 성적으로라도 내 존재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조바심을 내며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늘 초조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시간에 쫓기듯 공부하곤 했다.  


중요한 건 내가 공부하는 걸 너무나 싫어했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소설과 만화책을 보는 것을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소설가나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학년이 점점 올라갈수록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꾸역꾸역 공부를 해야만 했다. 누가 특별히 시킨 게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그때의 난 스스로를 공부기계로 여겼던 것 같다. 그때부터 이미 내 삶에 내가 없다는 알 수 없는 공허함과 괴리감을 느껴왔던 게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내 행동의 결과로 인정을 받아온 탓일까. 그런 공허함과 괴리감 속에서도 나는 애를 쓰며 무언가를 성취하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그랬다간 초라한 내 모습이 금세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조바심을 내며 애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 조급함 뒤엔 어린 시절부터 반복되어 온 잘못된 인정 욕구와 초라함에 대한 혐오가 뒤범벅되어 있었다.  






왜인지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인정 욕구를 지니고 있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집착에 가깝도록 애쓰고 애쓰는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성공한 존재가 되기 위해. 늘 빨리빨리 해내야 한다는 조바심과 압박감을 잔뜩 안은 채로.  


나를 얽매던 강박적인 생각이 하나 있었는데, 늘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게을러지거나 시간을 낭비하는 건 나쁜 일일뿐더러 그런 내가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스스로 초라함을 자초하는 행위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강박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오히려 점점 더 무기력해지곤 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내야 한다는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마음처럼 몸이 따라주지는 않았다. 그럴수록 내 조급함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런 식으로 나는 대학에 입학해서도, 사회에 나와서도 조급함을 잔뜩 끌어안은 채로 살았다. 여전히 나는 늘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기를 갈망했고 항상 외적인 성공, 나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무언가에 집착했다. 뭐든지 나를 증명할 만한 것으로 나를 채우기 위해 애썼다.  


성적, 등수, 스펙, 실적, 성과. 세상에 나를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얻어냈던 것들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하나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것들이 나의 가치를 높여준다 믿었고, 그래야만 세상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늘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포장할 수 있는 것들을 얻기 위해 애를 쓰곤 했다. 그렇게 조금 더 나은 포장지를 얻게 되면 조금은 안심이 됐다. 아, 나는 저만큼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구나, 사람들이 날 인정해주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반면에 내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들은 금세 포기하기 일쑤였다. 이것 역시 인정 욕구에서 비롯된 조급함이 원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시간을 노력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나은 포장지를 얻을 수 있는 것에만 힘을 쏟는 게 훨씬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고 얻기 위해 애쓴 결과를 이제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난날의 난 몸도 마음도 얼마나 아파야만 했는지 아직도 그때의 고통이 생생히 느껴지는 것만 같다. 그런데도 나는 그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고 또다시 그런 아픔을 반복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또 이렇게 나를 증명하기 위해 초조한 마음으로 애쓰고 있었다니. 도대체 얼마나 더 아파야 이 조급함이 사라질 수 있을까 깊은 슬픔이 나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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