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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지 Nov 01. 2020

18. 때론 슬럼프를 만나기도 하지만

매일같이 가장 기쁘고 좋은 날들만 이어진다면 과연 어떨까. 어린 시절의 난 늘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매일매일이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있었으면 하고 소망하곤 했다. 그러면 인생이 언제나 즐겁고 행복해할 수 있을 거라고, 아주 얄팍한 믿음을 지녔었던 것 같다. 그 뒤로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그게 얼마나 얄팍한 믿음이었는지 깨닫곤 했다. 인생이란 원래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가며 찾아오고, 그렇기에 기쁨을 기쁨으로 느낄 수 있는 것. 이건 내 삶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몸소 터득한 지혜였다. 그런데 그토록 바랐던 진짜 행복 앞에서 나는 그만 오래도록 잘 알고 있던 지혜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인간이 품고 있는 생각의 특성 중 하나를 꼽자면 지금 느끼는 생각이나 감정이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 여긴다는 점이 아닐까. 내 생각도 그런 인간의 특성을 빗겨나가지 못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영감이 찾아오고 끊임없이 글감이 쏟아지는 상태가 당연히 천년만년 계속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행복한 날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오랜만에 찾아온 완전한 기쁨의 상태가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겠지.  


그런데 행복했던 딱 그만큼 나는 다시 두려워졌다. 나에게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던 슬럼프라는 이름의 깊은 정체감이 나를 엄습해온 것이다.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정말이지 그동안 자연스럽고도 빠른 속도로 잘 나아간다고 느껴왔는데. 이렇듯 급작스럽게 느려지다 못해 멈춘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될 줄이야. 당혹스럽고 두려웠다. 이대로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또다시 내 주위를 맴도는 듯했다. 






슬럼프가 찾아왔다고 느낀 것은 엄청난 정체감 때문이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수많은 영감이 수시로 찾아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많은 글을 쓰곤 했는데, 이제는 왜인지 글 쓰는 게 즐겁지 않았고, 잘 써지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무슨 글을 써야 좋을지 막막해지기도 했다. 또다시 벽 앞에 막힌 듯한 느낌이 잊고 있던 불안과 두려움을 한꺼번에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될 줄 알았던 감정들이 이렇게 또다시 내 안에서 나타날 줄이야.  


하지만 나는 곧 무얼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이제 나는 그런 마이너스 감정들에 압도당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마음에 큰 요동이 몰아치기 시작하면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은 잠시 멈추어 서서 호흡과 몸 전체에 걸친 감각들을 아무런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조금은 소홀히 하고 있었던 명상에 좀 더 시간을 쏟기로 했다. 


며칠간 집중적으로 명상을 하면서 내 마음을 관찰하다 보니 내게 슬럼프가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의 빠른 속도에 약간은 취해있었다. 다소 흥분이 고조된 상태로 쉬지 않고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하루 종일 글을 쓰고 있던 상태였던 것이다. 내 안에서 자꾸만 글이 쏟아지는 바람에 그걸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주워 담으려 나도 모르게 무리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이 기세로 빨리 나의 첫 번째 책을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은연중에 나를 조금씩 질주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쉬지 않고 글만 썼으니 그냥 지쳐서 병이 났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오래된 지혜처럼 이런 식의 슬럼프란 사실 어찌 보면 몸과 마음이 지닌 자연스러운 리듬이기도 했다. 기계가 아닌 인간의 몸으로 살면서 매일같이 질주할 수는 없을 테니까. 몸도 마음도 사용한 만큼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책을 완성하겠다며 쉴 새 없이 생각과 마음을 혹사시키는 바람에 머리도 마음도 잠시 휴업상태에 들어간 게 아닐까 싶었다. 


처음 겪어보는 작업 과정에 미처 나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조금은 몰아세우고 있었다. 나는 지난 아픔들 덕에 더 이상 몸을 혹사시키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몸이 힘들면 마음이 저절로 멈추어 섰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몰아붙이지만 않는다면 몸이 지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마음을 섬세하게 돌보는 데는 내가 아직 서툴렀었나 보다. 몸은 쉬면서도 생각은 쉬지 못핸던 걸 보면. 


생각이 그만 좀 쉬고 싶다고 신호를 보낼 때에도 나는 혹시 모를 아이디어, 문득 떠오르는 문장이나 단어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쉬지 않고 마음을 채찍질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최근 들어 매일 아침마다 꾸준히 해오던 명상도 건너뛰기 일쑤였다. 유일하게 생각과 마음을 멈출 수 있는 시간인 셈이었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다 보니 정말로 마음이 쉴 틈이 하나도 없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마음이 파업을 해버린 까닭에 에너지를 받지 못하니 몸도 역시 파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슬럼프는 마음이 스스로를 위해 지어낸 처방전인 셈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처방전에 따라 마음을 쉬어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보면 내가 나에게서 멀어지려 할 때, 여지없이 슬럼프가 찾아오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나에게서, 내면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몸도 마음도 섬세하게 들여다보지 않고 나도 모르게 무리를 하게 된 것처럼, 한편으론 시간의 압박 속에서 나는 나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때문에 슬럼프가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최근 들어 글이 잘 쓰이자 이런 기세라면 삼 개월 내에 첫 책을 완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예 삼 개월 뒤를 원고 완성의 목표 기한으로 정한 후 쉬지 않고 생각하고 쓰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점점 시간의 압 밥을 크게 느끼기 시작했고, 목표한 기한을 맞추기 위해 좋아하던 일들을 하나 둘 하지 않기 시작했다. 명상도 줄이고, 책도 거의 읽지 않고, 산책도 주말에 겨우 할까 말까. 그렇게 나는 나로 사는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의 방향과 멀어지다 보니 속도가 느려진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이렇게 시작된 정체감이 내가 느끼는 슬럼프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글 쓰던 모습을 돌아보면 특히나 기한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쓸 때, 정해진 시간 내에 무언가 써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제대로 된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리고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게 그 어떤 참신한 내용이나 문장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때면 한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렇게 시계와 달력을 떠올리고 있을 때면 나는 나로 사는 느낌이 아니라 시간의 노예로 사는 느낌, 알 수 없이 재촉당하고 다그쳐지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아니, 글이 거의 나오지 않다시피 했다. 그런 시간의 압박 속에서는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점점 글쓰기를 멀리하게 되고 다가오는 기한을 보며 스트레스만 심하게 받곤 했다.  


나는 내 안에서 나오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내 안의 진짜 나는 시간의 압박 속에서는 좀처럼 바깥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는 무미건조하고 의미 없는 글만 겨우 쓸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쓰는 건 이제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행복하게 나만의 글을 쓰고 싶었다.  


내 안에서 글이 봇물 터지듯 나올 때는 시간 감각을 완전히 잊고 그냥 글쓰기 그 자체가 되었을 때였다. 시간을 잊은 채 몸과 마음에 전해지는 흐름을 따라 지금 쓰고 있는 글에만 집중하고 몰입하다 보면 글이 저절로 쓰여 나가는 느낌으로 쓰곤 했다.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이는 느낌이 묘하게 카타르시스를 주곤 했다. 그런데 그 느낌이 좋아서 억지로 쓰려고 하는 순간, 귀신같이 손가락도, 글도, 뚝 멈춰버리곤 했다. 그럴 때면 빨리 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그냥 흐름대로 쓰는 것만이 해결책이었다.  


나는 시간의 압박을 내려놓고 다시 자연스러운 나로 머무는 시간들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멈춤, 시간의 압박을 내려놓은 완전한 멈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뒤 다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다시 진짜 내 목소리로 글이 쓰이길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잠시 멈춰 서서 시간의 압박을 내려놓다 보면 슬럼프는 어느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편안하고 즐겁게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멈춰 서서 들여다보니 내가 시간의 압박을 받고 너무 몰아세웠던 것도 있었지만, 내게 슬럼프가 찾아온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나에겐 그동안 새로 배우고 알게 된 것들을 조금씩 천천히 소화시키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는 잘 알고 있듯이 나는 모든 순간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늘 성장하고 있는 까닭에 나에게는 끊임없이 새로운 배움이 찾아오곤 했다. 늘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고, 자연스레 그것을 해결하면서 몰랐던 것들을 배우곤 했다. 그렇게 새로 배우고 알게 된 것들이 상당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열심히 배울 줄만 알았지 알게 된 것들을 잘 소화시켜 내 안에 단단한 지혜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던 것이다.  


내게 슬럼프라는 이름의 정체기가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했다. 슬럼프는 한편으로 나의 배움을 온전히 소화하고 나만의 지혜로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꼭 거쳐가야만 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동안의 배움과 성장을 소화시키고 내면화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신호가 바로 슬럼프가 가진 또 하나의 정체였다. 


슬럼프를 겪지 않는다는 건 아마도 배움을 그때그때 잘 소화시켜 내 안에 잘 저장하고 있거나 아니면 새로운 배움이 전혀 없다는 신호일지도 몰랐다. 원래부터 멈춰있는 사람, 혹은 나아가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슬럼프란 애초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그렇다면 슬럼프란 자신의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휴식처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숨을 거르고 방향을 재정비하기 위해 멈춤을 선물해주는 고마운 휴식처. 그렇기에 더더욱 슬럼프가 찾아왔을 때 온전한 멈춤, 온전 전 한 쉼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실 때때로 찾아오는 정체기는 자연스러운 내 삶의 한 부분인데 나는 그저 불안하고 두려움이 동반된다는 이유로 슬럼프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알았듯 슬럼프는 내게 꼭 필요하기에 찾아온 소중한 손님과도 같았다. 사실 조금만 뒤돌아 생각해보면 나에게 찾아오는 모든 일들이 어느 것 하나 잘못된 것이 없었다. 나에게는 언제나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상황들이 찾아오곤 했다. 고통인 줄 알았던 상황들 마저도 나에게 큰 배움을 선물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임을 뒤늦게 깨닫곤 했다. 다만 내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을 뿐. 내가 조금만 멈춰 서서 마음을 돌아보고 편안해진다면 나에게 찾아온 순간들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나곤 했다.  


이제는 슬럼프라는 이름의 몸과 마음의 복합적인 정체 상태를 현명하고 건강하게 지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종종 나는 정체기를 맞닥뜨리게 되겠지. 그러면 잠시 멈추어 서서 내 몸과 마음을 돌아볼 시기임을 받아들이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 내 몸과 마음에 집중하는 시간을 선물해줘야지. 그때마다 나에게 이렇게 말해줘야지. 필요한 만큼 멈춰 있어도 괜찮다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즐겁게 하면 된다고. 언제나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걸 하자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말해줘야지. 이렇게 진심으로 내가 되는 시간들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응원할 때 나는 가장 큰 에너지를 받는다는 걸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면 오래지 않아 다시 키보드를 또각또각 두드리고 있는 나를 보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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