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일상에 충실하면서 글을 쓰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오롯이 내 속도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고, 일상 속에서 틈틈이 글을 쓰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이제는 정말 삶과 글이 하나가 되어 무엇이 먼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인 걸까, 글 쓰는 시간이 꽤 많이 줄었음에도 오히려 의미 있는 글들을 더 많이 쓸 수 있었다. 글을 저장해둔 노트 프로그램을 확인해 보니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글이 어느덧 수천 개에 달했다. 그동안 틈틈이 적어둔 이 토막글들을 잘 정리하고 엮어서 책을 만들면 적어도 다섯 권 정도는 금세 쓸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토막글을 쓰는 것과 한 권의 책을 완성하는 것은 너무나 달랐다. 막상 글을 모아서 책으로 구성해보니 각 책마다 분량이 채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다. 중복되는 내용들이 많았고, 그 사이에 내 생각과 가치관이 변해 더 이상 쓸 수 없는 내용들이 훨씬 많았다. 거의 4년 동안 쓴 글들을 대부분 휴지통으로 옮겨야 했다.
그래도 그 많은 글들이 쓸모 없어져 아쉽다기보다는 내가 전보다 더 괜찮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위안이 됐다. 글이야 또 금세 쓸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휴. 또다시 시작인가.’ 나는 휴지통에 넣어야 했던 지난 글들은 잊고 지금의 내 생각과 감정을 담아 한 권의 책을 완성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내 속도를 믿겠습니다.’ 나는 지금껏 대부분 이 메시지가 담긴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이런저런 공부를 하면서 내가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이 조금은 바뀌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새로운 책을 다시 써야 하나 고민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 가슴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 책을 꼭 써야만 한다고.
꼭 쓰고 싶은 책이었기에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처음부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껏 줄곧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이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이 메시지를 담은 글을 빠른 속도로 써 나갈 수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 정도 책의 뼈대가 잡혔고 꽤 많은 분량의 글을 채워 넣은 상태였다. 이렇게 전체 원고를 완성하고 한 두 번의 수정을 거치면 드디어 나의 첫 책이 완성되겠구나, 꿈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다.
다시 한 달이 지났고, 책은 아주 조금 더 완성에 가까워진 듯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원고에 아직 빈 곳들이 많이 있었는데, 생각만큼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쓰다 보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는 계속 조금씩 조금씩 쓰는 수밖에 없었다.
점점 시간은 가고 때때로 초조함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가슴 한편에선 아직은 때가 아닌 걸 거야,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간 딱 맞는 글로 채워지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 같은 게 있었다. 아마도 그 책으로 꼭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였으리라. 그래서 쓴 글을 고치고, 새로운 글을 쓰기를 반복하며 느리지만 차곡차곡 빈 곳을 채워나갔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완성이 될 때까지 계속해보기로 했다. 내 책이니까, 내 첫 작품이니까. 스스로 만족하고 납득이 될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들여보자고. 꾸준하고 끈기 있게 하는 것이 내 속도를 믿는 자의 태도일 테니까. 무엇보다도 그 모든 과정을 진심으로 경험해 나가는 게 너무나 중요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무슨 일이든 늘 결과만을 위해 무조건 빠른 속도로 해치우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제일 안타까운 기억으로 다가오곤 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엄청난 결과중시형 인간으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에 와서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려보면 내 인생에 커다란 구멍들이 뻥뻥 뚫려 있는 것처럼 마음에 남거나 인상에 남는 경험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분명 그 당시에는 너무나 치열하게 열심히 무언가에 몰두해 있었는데, 정말 내 인생에서 그 시간들을 칼로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기억도 남아있지 않다는 게 섬뜩했다.
그렇게 결과만을 보며 해치우듯 했던 일들은 아무리 열심히 했다 한들 소중한 추억 하나 남기지 못한 채 기억에서 사라지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마도 지금이라는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 채 온통 시선이 결과라는 미래의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어서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늘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앞으로 내 삶의 기억들을 도려내면서 살지는 말자고,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 펼쳐지는 과정을 온전히 즐기고 경험하자고 되뇌곤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모든 순간들을 소중한 과정들로 여기며 진심으로 살아보려 했고, 지금 이렇게 책을 완성하는 작업도 역시 그렇게 모든 과정들을 오롯이 경험하며 지나게 될 예정이었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들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한 달, 또다시 한 달.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지난하고 지난한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 고쳐쓰기의 과정이 너무나도 지겹고 힘들게 느껴지고 있었다. 내가 쓴 글을 보고 또 본다는 게 그렇게 고역일 수 없었다. 과정을 경험한다는 건 어쩌면 수많은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오롯이 겪어내야 한다는 의미에 가깝겠다는 무서운 예감이 스쳤다.
지금까지 꾸역꾸역 책 전체를 새로 갈아엎기도 했고, 크고 작은 부분들을 수정하고 수정하기를 벌써 열 번은 족히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으니까. 언젠가 이 고쳐쓰기의 과정이 끝나고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내보여질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그 지난한 과정을 버텨 온 것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아무리 고치고 고쳐도 책이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직도 빈 곳은 많이 줄어들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 않아 방치된 부분도 수두룩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얼마나 더 고쳐야 하는 건지, 과연 이 과정이 정말 끝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언제 가장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까. 아마도 이 정도면 충분히 한 것 같은데 될 것 같으면서도 되지 않을 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아닐까.
달력을 보니 꿈을 따라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어느덧 5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참 많은 걸 배우고 많은 걸 읽고 많은 걸 써왔는데, 왜 아직도 책 한 권을 완성하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인지. 마음이 먹먹했다. 이제는 더 이상 무얼 더 해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는 점이 마음을 너무도 먹먹하게 만들었다.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결과가 없어서일까, 이제는 가족들 마저도 조금씩 초조해하는 눈치였다. 포기라는 선택지가 지금 이토록 지쳐버린 내 희망의 끈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손을 뻗어 포기의 끈을 당기려는데, 문득 가슴이 내 손을 잡으며 외쳤다. 그 많은 고생 끝에 겨우 꿈을 찾고 여기까지 왔는데 저 앞에 정상을 바라보며 포기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맞아, 그럴 순 없어. 눈 앞엔 아직도 정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생생히 느껴지고 있는걸. 나는 우두커니 모니터 속에 띄워진 작업 중이던 원고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사실 무언가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서 대부분 채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곤 했다. 하다가 성과가 나오지 않거나 무언가 나와 맞지 않다고 판단되면 자의든 타이든 쉽게 포기하곤 했다. 그건 내 일이 아니라는 게 확실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포기했다고 해서 특별히 후회나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 비겁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포기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또한 나 자신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나는 빨리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용기고 능력이고 미덕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사실 이 정도 치열하게 노력했음에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과거의 경험상 나는 여기서 포기하는 게 옳았다. 쉽사리 포기하겠다는 결정이 서질 않았다. 그보다는 아직 더 해볼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의 빛이 저 깊은 곳에서 나를 비춰주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 정도의 희미한 희망만으론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지, 과연 난 책을 낼 수 있을까, 또다시 치열하게 달려 나갈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에너지가 샘솟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마음은 그래도 써야 한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현실적으로 언제까지 이렇게 결과물도 없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정말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게 느껴지던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하게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