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도를 믿겠습니다》.
나는 몇 년째 붙들고 있는 이 책의 원고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원고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자기들에게도 나름의 속도가 있다고, 너무 조급해말고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문득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작품들도 자기들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내가 그동안 너무 하나의 목표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 책은 완성되기에 조금 더 숙성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게 이 책의 성장 속도일지도 몰라. 그렇다면 내가 좀 더 믿고 기다려주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속도를 믿어주는 것은 곧 내 작품들의 속도를 믿어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쓰고 있던 책을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이렇게나 완성이 힘든 걸 보면 아직은 이 책이 나올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얼 써야 할까. 사실 이 책이 아니어도 구상하고 이미 쓰고 있는 책들이 두세 권 더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 책들도 아직은 완성하기에 때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슴만이 답을 알고 있겠지. 나는 자연스레 눈을 감고 가슴에게 물었다.
‘이미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알고 있잖아.’
가슴은 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답을 했다. 내가 답을 알고 있다고? 나는 좀 더 가슴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가슴은 정말 내 이야기를 쓰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잠시 멈추고 그냥 나를 위한 글을 써 보라고. 꼭 책을 내기 위해서, 목적이 있는 글만 써야 하냐고.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지금껏 나는 책을 내고 작가로서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글을 써 온 셈이었다. 그러니 내 글을 쓴다고는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독자를 위한 글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읽을 것을 전제로 쓰는 글은 아무리 즐겁게 쓴다 한들 마음 한 구석에는 늘 독자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게다가 글을 쓰는 게 즐거우면서도 늘 가슴 한편에 하루빨리 첫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마냥 즐겁게, 온전히 글 쓰는 즐거움 그 자체만을 위해서 쓰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가슴이 내게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정말 내가 쓰고 싶은 글, 정말 나를 즐겁게 하는 그런 글쓰기를 한 번 해 보라고. 독자를 의식하지도, 출간을 염두에 두지도 말고 그냥 한 번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을 마음껏 펼쳐보라고.
생각해보면 굳이 거창하게 책으로 엮어야만 글을 쓰는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 나는 글을 쓰고 있을 때 내가 사라지고 글과 내가 하나 되는 신비로운 경험이 좋았고, 그렇게 쓰인 글들이 내게 말을 건넬 때도 좋았다. 물론 전업작가를 목표로 한 이상 조만간 책을 내고 앞으로도 계속 책을 출간해야겠지만,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런 글쓰기 그 자체의 즐거움을 즐겨봐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당분간 책에 대해서는 잊고 그냥 즐겁게 뭐든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이왕이면 오직 나만 위로하고 나만 즐거운, 그런 글을 써보자고.
그때부터 나는 그저 하루하루 느끼는 감정들, 나만이 품고 있는 생각들을 적어나갔다. 밑도 끝도 없이 허무맹랑한 글들을 써보기도 했고, 나를 칭찬하고 위로하는 글, 등산하는 즐거움에 대한 글, 혹은 BTS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동안 가슴속에만 혼자 간직하고 있던 이야기들을 마음껏 토해내고 있었다.
어머나, 글쓰기가 이렇게나 즐거운 것이었다니. 벌써 5년째 쓰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글쓰기 자체를 놀이처럼 즐겨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홀가분하고 유쾌한 글쓰기를 하고 있자니 책을 내고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어야만 작가가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 즐기며 쓸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작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독자를 생각하며 글을 쓸 때보다, 이렇게 나를 위해 쓰고 있을 때, 그보다도 글쓰기 그 자체에 그냥 푹 빠져 있을 때의 내가 훨씬 더 작가답다고 느껴지곤 했다. 나는 이런 작가다움을 마구마구 발산하며 즐거운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미약하게나마 확실해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냥 이렇게 일기 쓰듯,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글로 옮기다 보면 그 속에는 분명 나만의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쓰면 쓸수록 글들이 점점 한 방향으로 모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글들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내가 쓴 글의 대부분이 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내 삶을 응원하며, 내가 하는 모든 일을 긍정하고 힘을 주는 내용이었다. 나는 글을 통해 나의 지난 5년을 위로하고 응원했으며, 내 인생 전체를 위로했고, 지금껏 꿋꿋이 버텨온 나를 칭찬했고, 무엇보다도 그냥 나, 지금 이대로의 나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내 글들이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저 나인채로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내가 내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거면 된다고. 그냥 지금처럼 나답게 걸어가라고. 나는 그냥 나이기만 하면 된다고. 와락. 눈물이 흘러내렸고 나는 그만 목놓아 울어버렸다.
내가 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지 내 글이 나를 응원하고 위로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도 나는 그냥 나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내 글을 통해 나왔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정말로 내가 되었다는 것, 다른 누가 될 필요도 없고, 더 나은 내가 될 필요도 없이, 그냥 지금 이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 글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정말로 바라 왔던 꿈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이 길에 들어서던 5년 전이 떠올랐다. 그때의 난 뭐가 그리도 되고 싶은 게 많았는지. 늘 그때의 내가 아닌 미래의 더 나은 내 모습만을 꿈꾸며 살았었는데.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미래에 더 나아질 내 모습을 떠올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과거의 내 모습을 그리워하지도 않았으며 그냥 언제나 지금의 나로 충실히 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고, 내가 쓸 수 있는 글로 써내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에 대해, 내 글에 대해 어떤 확신이 생기고 나니 그저 아, 이제부터 진짜 내 목소리를 담아 써나가면 되는구나, 안도감이 든달까. 아, 정말이지 그냥 나이기만 하면 되는구나. 나이기만 하면.
오랜만에 친구에게서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나처럼 작가가 되기 위해 홀로 글을 쓰고 있는 친구였다. 한동안 연락이 없어 궁금했는데, 왜인지 걱정이 앞섰다. 우리는 함께 어느 산 중턱에 지어진 시골집에서 하룻밤의 휴가를 보냈다. 친구는 원고와 씨름하며 작가로서의 삶에 대해 다시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결국 글을 쓸 것임을 느꼈으나 그저 가슴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라고 얘기해주었다. 친구도 이미 답은 자기 안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에겐 자신의 방향으로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일 뿐. 아마도 친구는 때가 되면 성큼 발을 내딛겠지, 자기의 속도에 맞게.
우리는 난로를 피우고 뒷산에서 주운 밤을 구워 먹으며 오랜만에 따스하고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친구가 불쑥 어느 출간 공모전 이야기를 꺼내며 나도 거기에 지원해보라고 했다. 문득 나는 한참 동안 쓰다 지쳐버린 《내 속도를 믿겠습니다》의 원고를 떠올렸다. 아직 새로 쓰고 고쳐야 할 부분이 많았지만, 왠지 지금이라면 이 책을 완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래, 이번엔 정말 완성해 보는 거야. 기한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드디어 이 책을 완성할 수 있겠다는 설렘이 조급함과 걱정을 완전히 가라앉혀주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묵혀두었던 원고를 다시 꺼내어보았다. ‘안녕, 많이 기다렸지. 우리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우리는 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답했다. 정말 때가 되었다는 신호 같았다.
나는 원고를 주욱 펼쳐놓고 1장부터 다시 차근차근 글을 완성해나가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새로 써야 했지만 나는 밤낮으로 책을 완성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때때로 압박감에 압도당할 때면 멍해지기도 했지만 나는 이내 글쓰기에 집중하며 한 문장 한 문장 정성스레 공백을 채워나갔다.
그렇게 제출 기한이 다가왔고, 나는 드디어, 그토록 꿈꿔왔던 나의 첫 책을 완성해내고야 말았다. 홀가분했다. 아, 내 작품을 완성한다는 건 이런 기분이었구나. 내 안에 꽉 막혀 있던 무언가가 쑤욱 빠져나간 느낌. 더 이상 이 이야기에 묶여있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시원섭섭함과 함께 정말이지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아직은 초고를 완성했을 뿐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계속 고쳐 써야 할 것이고, 책으로 나오기 위해 이런저런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드디어 내가 처음 이 길에 들어설 때 목표했던 바로 그것을 해냈다는 게 너무나도 기뻤고 스스로가 무지무지 대견스러웠다. 이 책 한 권을 써내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나왔는지.
공모전의 결과는 앞으로 두 달 뒤쯤 발표될 예정이었다. 수상을 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이 책을 마지막까지 잘 완성하여 세상에 내보일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을 오롯이 즐기고 경험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나에겐 충분한 선물이 되고도 남았다. 어쨌든 일단은 밀린 잠을 좀 자기로 했다.
나는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아주아주 깊은 잠을 잤다. 다음날 눈을 뜨니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햇살은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지금의 나를 전적으로 응원하고 있다는 듯이. 나는 지금 여기에 나를 있게 한 모든 존재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태양에게로 날렸다. 따스한 햇살을 통해 내 고마움이 그들에게 가 닿기를 기도하면서.
이제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을 충실히 살며 틈틈이 글을 써나갈 것이다. 또다시 일련의 지난한 과정들을 거쳐 책을 써내는 일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언제나 그렇듯, 내 속도를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