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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지 Nov 01. 2020

19. 내 속도로 한 걸음 한 걸음

이제는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내 몸과 마음이 알아서 진짜 나에게로 향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런 특성이 원래 우리 몸과 마음의 특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애초에 자신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것 아닌가 하고.  


어쨌거나 나는 얼마간 나를 찾아온 슬럼프를 잘 보내고 내가 그동안 배우고 알게 된 것들을 잘 소화시킨 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엄청난 영감 폭죽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제 점점 나만의 글 쓰는 속도와 방법을 익혀나가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나에 대해 깊숙이 알아가는 기분 좋은 느낌이 내 손가락을 춤추게 하곤 했다.  


이제는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삼 개월로 정했던 첫 책의 원고 완성 기한을 없애버렸는데, 나는 아직 마감을 정해놓고 글을 뽑아낼 수 있는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좀 더 실력을 쌓을 필요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나에게 맞는 글쓰기의 속도와 스타일을 찾는 게 중요했다. 지금은 책의 완성보다는 나답게 쓰는 방식을 보다 더 고민하고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고민할 때였다. 이 두 가지는 내가 나일 때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역시나 나답게, 내 속도대로 나아가는 게 중요했다.  


마감 기한을 두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꿈꾸는 삶은 전업작가로서 책을 내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서 글만 쓸 수는 없었다. 도대체 언제 책을 완성할 수 있을지 조금은 답답하고 막막한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무얼 하는 게 맞을지 고민이 됐다.  






등산을 좋아하는 나는 포기하지 않고 정상에 오르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정상을 바라보는 대신 그저 내 눈 앞의 10미터 남짓의 길만을 바라보며 걷고 또 걷는 것이다. 그러다 조금 험난한 지형을 만나면 바로 코앞에 놓인 장애물에 집중하며 조심조심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한 발 두 발 걸어가다 보면 정말 그만 포기하고 싶을 때, 마침내 정상이 고개를 내밀곤 했다.  


나는 너무 멀리 보지 않기로 했다. 10미터, 아니 일단은 1미터 정도만 내다보며 걷자고. 200페이지가 넘는 책 한 권을 당장 다 쓰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오늘 무슨 글을 쓸지, 지금 쓸 수 있는 글에 대해서만 집중해보기로 했다. 지금 쓸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만큼 쓰면 된다. 단지 그뿐이었다. 잘 쓰려할 필요도 없고, 빨리 쓰려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글이라면 그게 뭐가 됐든 단 한 문장, 하나의 단어라 할지라도 그걸 쓰면 되는 것이었다.  


늘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무겁게 어깨를 누르고 있었는데, 그냥 이렇게 내가 하루하루 쓸 수 있는 만큼 쓰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완성이 되지 않을까,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무조건 많은 양을 쓰려하기보다 내 속도를 익히며 내가 쓸 수 있는 글을 찾아야지. 나는 책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그저 오늘 무엇에 대해 쓸 것인지만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다운 글을 찾아나갔다.  


특별한 목표 없이 쓰다 보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안개 낀 숲 속을 걷는 것처럼 앞이 뿌옇게 가려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제는 칠흑같이 어두운 길 위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는 점. 나는 뿌연 안갯속에서도 다음 발걸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는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으면서 한걸음 한걸음 글을 써 나아갔고 나는 이제 나다운 속도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 글쓰기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언제 어디서든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무언가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느낌은 내가 쓴 글에서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글이 나쁘진 않은데, 메시지는 나쁘지 않은데, 왜인지 꼭 있어야 할 무언가가 빠져있는 느낌. 무엇보다도 글이 지루하고 딱딱했다. 이건 전혀 나다운 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문제인 걸까.’  


나는 내가 쓴 글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참을 읽다 보니 알 것 같았다. 내 글에 빠져있는 게 무엇인지를. 그건 바로 ‘나’였다.  


내가 쓴 글인데 내가 없다니. 정확히는 ‘내 삶’이 하나도 없었다. 내 글은 온통 내가 읽은 것, 혹은 그것에 대해 내가 생각한 것 투성이었다. 읽은 것도 생각한 것도 모두 내가 한 것이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나오지는 않는다는 걸 내 글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다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을 나답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내 속도로 쓴다는 건 사실 글쓰기에만 국한할 문제가 아니었다. 내 속도로 쓰기 위해선 우선 삶을, 일상을 내 속도대로, 나의 리듬에 맞게 살아야 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내 속도에 맞는 글쓰기가 아니라 내 속도에 맞는 나다운 삶을 사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은 삶 전체를 내 속도대로 살자고 다짐했으면서 온통 글쓰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니. 이래서는 전혀 내 속도라고 할 수가 없잖아. 내가 그동안 책을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일상을 너무 놓치고 있었구나. 사실 내가 책을 쓰려는 이유도 일상을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였는데.’ 


나는 그동안 하고 싶은 것, 혹은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만을 하면서 나머지 일상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 오르는 데만 집중한 나머지 내가 걷고 있는 이 산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내가 가는 길 옆으로 얼마나 눈부신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는지 모두 다 놓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 내가 보려고 했던 건 정상 위에서만 볼 수 있는 경치가 아니라 바로 이런 산속의 소소한 풍경들이었는데. 


그제야 내가 놓친 일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 치웠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집안 곳곳에 먼지가 수북했고, 두 마리의 반려견은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였고, 쓰레기통은 온통 배달음식이 담겼던 플라스틱 용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깅도, 등산도, 운동을 하지 않은지 참 오래된 것 같았다. 그동안 꿈을 이루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일상의 너무 많은 것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어쩌면 일상을 소중히 사는 태도에서 꿈을 이루는 힘도 나오는 게 아닐까. 왜 나는 이렇게 쉬운 길을 두고 힘들게 헤매고 있었을까. 이제는 정말로 나를 위한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일상이 구멍 난 반쪽짜리 삶이 아닌 온전한 삶을. 






그때부터였다. 나는 구멍 난 일상을 돌보며 진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환기를 하고 간단히 청소를 했다. 간단히 몸을 움직이니 엔도르핀이 솟는 것 같았다. 점심과 저녁은 가능하면 직접 요리를 해 먹었다. 간단한 샌드위치부터 건강한 집밥까지. 요리는 예상외로 너무나 즐겁고 삶의 만족감을 엄청나게 높여준다는 걸 새삼 깨닫기도 했다. 소홀했던 관계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자주 뵈러 다녔고,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시간도 점차 늘려나갔다. 무엇보다도 내가 너무나도 예뻐하고 사랑하는 반려견 꾸꾸, 제이와의 산책시간을 많이 늘렸다. 그동안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너무 신경을 못 쓴 것 같아 늘 마음이 걸렸는데 이제는 미안함보다 함께 즐거움을 경험하고 싶었다.  


점차 내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었다. 이전엔 오로지 글쓰기, 책 쓰기가 가장 중요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일상을 충실히 보내는 게 가장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언제나 일상을 돌보는 게 최우선이 되었고, 그다음이 글쓰기였다.  


나는 읽고 싶은 책도 틈틈이 읽고, 명상도 하고,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강아지들과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고, 데이트도 하면서, 글도 썼다. 빨리, 많이 써내겠다는 욕심만 버리면 꼭 해야만 하는 것들을 충실히 해내면서도 충분히 쓸 수 있었다.  


물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많이 줄었지만 그보다 훨씬 풍성한 삶이 나를 늘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목표한 첫 책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게 정말 내 속도라는 확신이 들었다. 글쓰기와 삶의 균형을 맞춘 뒤 나오는 속도, 그게 바로 진정한 내 속도일 거라는 확신이 내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는 일상의 모든 걸 팽개치고 글쓰기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질주하는 건 내 속도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삶과 균형을 맞추며 일상을 살아가는 것에도, 글을 쓰는 것에도 모두 다 충실하게 건강하게 걸어 나갔다.  


이처럼 일상을 충실히 살고 있다 보면 종종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느끼곤 했다. 일상이 내게 선물을 한가득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또다시 수많은 영감이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일상을 오롯이 잘 경험할수록 글이 풍성하고 다채로워졌다. 점점 내가 쓰고 싶었던 글에 가까운 글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 많은 글을 써내지는 못했지만 진정한 내 속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나를 기쁘게 했고, 조급함이 싹트지 못하게 해 주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했다.  


물론 일상이 늘 즐겁고 기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종종 크고 작은 문제들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일상을 돌봐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진심으로 살아내기만 한다면 삶의 모든 순간들이 내게 영감으로 돌아온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 마저도 모두 다 내 속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오늘 내딛을 수 있는 한 걸음을 잘 걸어 나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속도를 완전히 믿으며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 쓸 수 있는 만큼 글을 써 나아갔다. 이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 언젠가 정상에 이르게 될 거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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