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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by 베를린부부

베를린으로 가던 길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설렘과 두려움, 딱 그 반반이었다.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도시를 향한 미래의 기대와 이걸 어떻게 하나 싶은 걱정들. 당시 나에게 분명한 건 딱 한 가지였다. '베를린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으니 어서 빨리 정리하고 서울로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1년짜리 계약도, 잠시 뿐인 임시거처도 크게 상관없었다. 당시 나에겐 모든 것이 그저 '현재'였을 뿐이었다.


3년째 넘어가던 그즈음부터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이 도시에서 오래 있을 수 있겠구나.' 직장에서 예상치 못한 호재로 좋은 소식들이 있었고, 덕분에 비자도 염려 없이 계속 이어졌으며, 드디어 그렇게 구하기 힘들다던 거처도 안정적으로 구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결국 일상을 구성하는 아주 작은 요소들이 모이고 모여 나의 하루하루를 만들고, 그 하루하루가 나의 의지를 만들고, 그 의지가 나의 일상을 다시 강하게 만드는 그 순간이 그즈음 이어진 것 같다. 그제야 베를린 생활이 조금씩 재미있어지기도 했다.


지하철에서는 무작위로 인종차별과 같은 봉변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런가 보다'정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후에 한 가족의 일원이 되고 그 가족의 일원으로 맡은 바 일상의 책임을 다하는 역할로 이어졌다. 그러니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는 아주 미묘한 차이이다. 안정적인 생활이 먼저일까, 의지가 먼저일까. 물론 그 사이 하루에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내 깊은 마음속 요동은 나만의 개인적인 영역이다.


베를린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것은 단순한 귀국이 아니었다. 2008년 서울에서 마드리드로 출발한 여정의 마지막 대장정의 마무리였다. 그 후 바르셀로나, 그리고 베를린. 돌이켜보면, 내가 이렇게 다양한 도시를 오가며 이런 기록을 남기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 한국을 떠날 때의 나는, 나름대로 더 단단해지고 멋있어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때 기대한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 상상한 미래와는 너무나 다른 곳에 서 있다. 나의 상상과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 고맙고 감사한 일들뿐이다.


장소를 옮기고 낯선 도시에서 살아갈 때마다, 일상 속에는 실수와 시행착오가 끝없이 반복됐다.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았고, 가족들과 의견이 달라 갈등하기도 했다. 수많은 공모전에서 좌절하고, 베를린에서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힘겹게 서류를 작성하며 속으로 분노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 모든 어려움이 그저 ‘다른 곳에서 살아서’ 생긴 건 아닌 것 같다. 단지 내가 조금씩 나이가 들며 겪어야 했던 성장통 같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30대의 나를 괴롭히던 그 수많은 혼란과 고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베를린에서 겪었던 일련의 일들이 '베를린이어서'일어난 것들이 아니라, 그저 살면서 생긴 일상처럼 느껴진다.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나는 조금씩 겸손해졌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조차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 불확실한 내일을 붙잡고 애쓰는 대신, 오늘 주어진 삶을 더 성실히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가족과 함께한 작은 실험들, 장소가 만들어낸 미묘한 감각의 차이들, 건축이라는 직업을 통해 얻은 경험들이 결국 나를 지금의 자리까지 데려다 놓았다. 어느 곳에 있든, 어디로 가든 결국 중요한 건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과정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지금의 나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아주 화려하고 큰 작업을 하는 건축가가 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과 행복이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히려 매일 출퇴근하는 평범한 일상이, 낯선 도시에서 우연히 듣는 새소리와 풍경들이 더 소중하고 멋진 경험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남은 것은 결국 지금의 나, 현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상상했던 미래와 전혀 달라도 좋다. 이제 나는, 나에게 주어지지 않은 기회나 내가 갖지 못한 미래를 아쉬워하기보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더욱 진지하고 재미있게 해 나가기로 했다.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실수할 테고, 다시 무언가에 열심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렇게 반복되는 오늘들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갈 거라는 믿음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그러한 믿음이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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