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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소리, 서울의 풍경

by 베를린부부

우리가 살 던 집 앞에는 5층보다 더 높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바람이 부는 날임을 그 나무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깨닫곤 했다. 저 멀리 하늘을 향해 솟은 큰 가지들이 좌로 우로 천천히 움직이면 나뭇잎들이 스치듯 소리를 내곤 했었다. 대체 이 나무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그 나무를 기억한다. 고요한 아침, 아이들이 먼저 일어나지 않는 아침이면 가장 먼저 깨어나는 건 귀였다. 아직 흐릿한 의식 속에서부터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과 나뭇잎 소리에 서서히 깨어나곤 했다. 베를린 첼렌도르프(Zehlendorf)의 아침은 자연으로 가득했다. 언젠가 누나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평소처럼 안부를 주고받던 통화였는데,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물었다. “이게 새소리야?” 나도 모르게 수화기 너머로 흘러간 소리에 놀란 듯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누나는 전화를 끊을 때까지 신기하다는 듯 계속 물었다. “진짜 밖에서 나는 소리야? 거기 새가 왜 있어?” 그때 깨달았다. 서울에서는 듣기 힘든 자연의 소리들이, 베를린에서는 일상의 배경처럼 흐르고 있었다는 걸.


육아 휴직 기간 동안 아침이면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유치원에 데려다주곤 했다. 집에서 자전거로 10분 남짓의 거리였다. 아이를 뒤에 태우고 느리게 달리다 보면, 골목마다 오래된 가로수 아래로 햇살이 쏟아졌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는 부모들, 그리고 그 모든 소리 위를 흐르는 새들의 지저귐. 자전거 바퀴가 돌 때마다 포장도로의 미세한 요철이 손끝으로 전해졌고, 작은 바람에도 나뭇잎은 바스락거렸다. 유치원 근처는 자연스럽게 자유대학교(Freie Universität Berlin) 캠퍼스가 펼쳐졌다. 캠퍼스와 동네 사이에는 경계가 따로 없었고, 학교만큼이나 오래된 높은 나무들이 겹겹이 건물과 주택가를 감쌌다. 학교와 숲이, 그리고 일상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어디에나 자연이 스며든 풍경이었다.


여름날이면 우리 가족은 첼렌도르프 남서쪽, 지하철 3호선 종착역 근처에 있는 슐락텐제(Schlachtensee)로 향했다. 조용한 골목을 지나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시야가 열리면서 햇살을 머금은 호수가 펼쳐졌다. 수면 위로 오리들이 유유히 미끄러져 다니기도 하고, 근처에서 사람들이 수영도 한다. 물가 가까이에 서 있으면, 발끝으로 잔잔한 물살이 모래를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그러나 한 번 들으면 머리에 계속 맴도는 소리다. 숨을 죽이고 오래도록 서 있다 보면, 그 소리들이 마치 몸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슐락텐제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크루메랑케(Krumme Lanke)가 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더 깊이 숲 안쪽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이 호수는 슐락텐제보다는 작고, 물빛은 훨씬 짙다. 둘레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바람이 수면을 어루만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바람이 물을 스치듯 톡톡 건드리는 소리를 즐기곤 했다. 아주 더운 지난여름, 우리 가족은 종종 친한 가족과 함께 호숫가에 모였다.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잡고,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펼쳤다. 아이들은 서로 물속으로 뛰어들며 환호성을 질렀고, 도시락을 나누고, 번갈아 패들보트를 타며 호수를 가로질렀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호숫가에는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와 더위를 식혀주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춤추는 소리, 물을 튀기며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른들의 수다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베를린의 겨울, 흐린 날이면 호수는 천천히 비에 젖었다. 낮에도 좀처럼 밝아지지 않는 하늘 아래, 사람들의 발걸음이 드물게 이어졌다. 비가 내려도, 눈이 내려도 숲길을 따라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이들은 여전히 있었다. 기온은 영상 2~3도 안팎이지만, 습한 공기 탓에 뺨과 손끝은 금세 얼얼해졌다. 빗방울은 크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떨어지며 호수와 길가를 조용히 적셨다. 사람들의 소리는 멀고 작았다. 숲을 채우는 것은 오히려 자연의 소리였다. 젖은 낙엽이 흙길을 푹신하게 덮곤 했다. 겨울이라 나뭇가지에는 나뭇잎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바람이 불 때마다 숲 전체가 스산하게 울렸다. 여름날 풍성한 잎사귀들이 만들어내던 부드러운 마찰음은 사라지고, 빈 가지들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이끼 냄새가 젖은 흙냄새와 함께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드디어 시작된 서울의 봄은 다른 생기를 가지고 있다. 어제는 오며 가며 눈 여겨봤던 재래시장에 들렀다. 봄의 기운을 가득 담는 봄나물이 봄의 향기를 가득 품고 있다. 그 나물이 전해주는 상쾌한 맛은 뇌가 더 짜릿하게 기억하는 것 같다. 따스한 날씨가 더워질 때쯤 내리는 시원한 봄비는 청량한 시야를 즐기게 해 준다. 봄비를 머금고 푸른 이파리를 건물 사이사이 꿋꿋이 피워내는 나무들은 도시의 풍경을 서서히 바꾸고 있다. 넓디넓은 자연 그대로의 호수나 집 근처 우거진 나무들은 없지만 그 나름의 질서와 순서를 가지고 푸르름을 맞이하는 서울의 멋이 있다.


베를린과 다르게 고층 건물과 언덕이 많은 서울은 그만큼 다양한 각도와 방향에서 도시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어디든 눈을 돌리면 저 멀리 능선이 드디어 시작된 서울의 봄은 다른 생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능선이 뚜렷하게 보이는 청량한 날씨와 화창한 태양은 언제나 설렌다. 익숙하지만 여전히 설레는 이 풍경 속에서, 자연이 주는 소리 대신 햇빛이 밝혀주는 풍경으로 봄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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