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펫크리에이터 모리 Oct 29. 2024

외계인은 출입금지

열한번째 걸음

그날은 하마터면 기록적인 날이 될 뻔했지만 그렇지 못해 아쉬움으로 점철된 하루였다. 


클로이가 마라를 입양하기 전, 그녀의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날.

우린 수업이 끝난 후 그녀의 집으로 놀러 가 마치 이곳이 서양이 아닌 동양인 듯, 침대에 등을 기대고 가좌자세를 튼 채 바닥에 한껏 널브러져 있었다. 


[모리, 우리 도그워커나 해볼까?]


클로이가 내게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여기 사이트에 등록하면 근처에 사는 반려인들을 연결해 준데.]

[정말?]

[응!]

[우리도 할 수 있어?]

[그럼! 안될 건 또 뭐야?]


뉴욕 도그워커의 뒷모습 1



두려움이란 단어도 클로이 앞에서는 언제나 맥을 못 추고 물러났다. 그녀는 무언가 새로운 걸 시도하는데 항상 거침이 없었다. 몇몇 친구들은 그런 그녀가 부담스럽다고 하는 반면 나는 타지생활 선배인 그녀에게 존경심마저 느꼈다. 뉴욕에서 학교생활을 하면서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경험했던 백가지 정도의 새로운 일들 중 오십 가지 정도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클로이 덕에 나는 새로운 경험들에 과감히 나 자신을 던지며 (언제나 그녀가 함께였다.) 매해 두 뼘, 세 뼘 더 성장할 수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이벤트들이 줄줄이 벌어지는 당황스럽지만 재밌는 삶을 사는 그녀의 일상은 축제였다. 그날도 나는 그녀의 축제에 초대받았다.


각자 핸드폰을 들고 도그 워커와 반려인을 연결해 주는 사이트에 접속해 가입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많았다. 이름, 생년월일, 성별, 반려동물 유무, 등등....... 곧이어 질문지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끝인가? 이제 도그 워커가 된 것인가!



뉴욕에서 지내면서 내내 나는 우리 집 반려견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으므로 무척이나 네발친구들이 그리운 상태였고, 하필이면 매일 반려동물과 촬영하는 일을 하던 덕에 반려인들을 향한 부러움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니 도그워커를 하면서라도 반려동물과 직접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내게 큰 기대감을 가져다줬는지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전달이 될 것이다. 도그워커라는 당시 한국엔 있지도 않았던 직업을 해보겠다며 나섰던 데에는 그만큼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마지막 질문에만 답하면...!



뉴욕 도그워커의 뒷모습 2


그러나 그날 클로이가 내게 초대한 축제는 생각보다 일찍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초대받은 자가 그곳에 있을 자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축제장 입구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외계인은 입장금지' 


입구에 서서 벙쪄있는 내게 클로이가 물었다. 


[모리, 소셜넘버 없어?]

[응....?]


소셜 시큐리티 넘버 (Social Security Number)란 말 그대로 사회 보장 번호이다. 미국에서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이 번호는 말하자면 외국인 등록증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보통 미국에서 일을 할 경우 미국 정부로부터 이 번호를 받게 된다. 나도 나중에서야 일을 하며 SSN을 받게 되었으니 그전까지 나는 주민등록증도 없는 외계인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의 과거 외국인 등록증은 ALIEN 어쩌고로 기재되어있었다.)


안 그래도 억울하고 씁쓸할 일들을 자주 겪게 되는 타지생활에서 나를 만나본 적도 없는 자들에게 받은 부적격자라는 타이틀에 나는 쓸데없이 절망 섞인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 분노는 필시 그들을 향했다기보다는 반려동물과 산책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서 날아가 버렸다는 꺾인 기대감에서 기인한 것이었으리라. 웃긴 것은,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이벤트였지만 그날 느낀 억울함은 생각보다 긴 시간 나를 쫓아다녔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산책하는 반려견들을 볼 때마다, 한국에 두고 온 나의 네발 친구들이 그리워질 때마다, 클로이가 옆집 개를 산책시켜 주러 떠날 때마다 나의 부러움과 억울함은 한층 짙어졌다. 그런데 또 그들을 보며 절로 깨닫게 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그 워커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확신이었다. 


외국인 등록증도 없는 유학생이 반려견을 산책시켜 주겠다며 집 문밖에 나타난다면? 개가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무슨 사고라도 나면 타지인이 이곳에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반려인이라면 당연히 할 수밖에 없다.


뉴욕 도그워커의 뒷모습 3


한 번만 역지사지를 해보면 억울하던 그 무엇은 금세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생각해 보니 나는 당연히 자격이 안 되는 것이 맞았다. 반려동물들의 안전을 위해 그들이 외계인을 입장시키지 않는 것은 어떤 면으로 보나 옳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외계인으로써 기꺼이 그들의 거절을 당하기로 했다. 뉴욕의 반려문명을 지켜 주기 위해 외계인은 일단 떠나 주기로 한 것이다. 침공하려던 -아니, 나는 그것이 침공이 아닌 친목인 줄 알았지- 우주선이 떠난 자리에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반려풍경만이 남았다. 뉴욕 길거리 위 네발 친구들의 평온함의 이유는 날 선 규칙들과 이를 기꺼이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애쓰지 않고 지켜지는 것들은 없었다. 비록 쫓겨난 축제였지만, 내 안에 남은 것이 많은 날이었다.

이전 12화 반려동물 보유세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