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걸음
필름사진을 다루다 보면 30장이 채 되지 않는 필름 한 롤에서 건질 수 있는 사진은 기껏해야 10-15장 정도가 된다. 잘못 찍은 사진들,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들을 전부 휴지통 속으로 끌어넣고 나면 존재했던 장면들은 내 기억 속에서 영영 잊히는 없는 장면들이 되어버린다.
나는 항상 그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잘못 찍힌 사진들도 전부 쓰레기통에 밀어 넣는 대신 스캔한 그대로 폴더에 담에 차곡차곡 모아두기 시작했다. 미적으로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갈수록 쌓이는 자료들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냈다. 무엇이든 오래 지속하다 보면 축적된 시간에서 오는 힘이 있지 않나.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 수록 무엇이든 꾸준히 하는 것에서 오는 힘보다 강한 건 없다는 생각이 더욱 짙어진다. 시간은 약, 시간이 금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시간에 관한 옛 속담들은 간결하면서도 인생의 정수를 온전히 담고 있는 인생의 길잡이와 같다는 걸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잘못 찍힌 사진들은 모두 'B컷'이라 이름 붙인 폴더에 꾸준히 쌓아놓았다. 한 장 한 장 대충 보면 잘못된 순간들의 총집합 같이 보이는 것이 처음 느낌이라면, 계속 보다 보면 또 그 안에서 재미를 발견하게 되어 가끔 생각이 날 때마다 열어보고는 한다. 그러다 보면 '어, 이걸 왜 내가 B컷 폴더에 넣어두었지?'라던가 '이거 재밌는데?' 라며 예전엔 분명한 실패로 보였던 사진들이 꽤 괜찮은 컷들로 다시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사진은 더 이상 잘못 찍힌 사진이 아닌 '재밌게 포착된' A컷사진이 된다.
대체 누가 '잘못 찍힌 사진'이란 정의를 당당히 설명할 수 있을까?
뉴욕에서 사진을 전공하며 배웠던 수많은 것들 중 가장 의미 있었던 배움은 아래와 같았다.
첫째, 사진을 볼 줄 알게 된 두 눈.
둘째, 세상에 잘못 찍힌 사진은 없다는 사실.
이 두 가지는 절대 붙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양 극단의 것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진을 볼 줄 아는 눈을 깨닫고 나면 세상엔 잘못 찍힌 사진이란 건 없다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근본적으로 사진이 하는 역할이 인생을 사각형 프레임 안에 저장해 놓는 것이란 걸 안다면 잘못된 사진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온전히 존재했던 순간이고 그것이 잘못 찍혔다면 그것은 언제나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찍을 수 있었던 가능성이 있었을 뿐, 사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순 없다. 사진 속 모든 순간은 실제 존재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고결하고 중요한 역사의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A컷이냐 B컷이냐를 따지는 건 사실상 우리의 인생을 두고 B컷 인생이라 말하는 것 과 다를 바가 없다.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 생의 대부분의 시간은 B컷이나 C컷쯤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A컷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카메라를 들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지 않을까. 삶의 모든 순간이 A컷일 순 없기에 잠시 스쳐가는 최고의 순간을 꼭 부러 남겨놓고 싶은 것이다. 생각해 보니 약간 서글퍼진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B컷들도 사랑하기로 마음먹으면 그 안에서 무궁무진한 재미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B컷은 우리의 삶을 삶답게 지탱해 주는 중요하고 멋진 컷들이다. 그 사이사이에 섞인 C컷들과 여타 다른 버려질 컷들에서도 분명 다시 보아야 할 것들은 있다. 모든 순간이 의미 있다는 걸 깨닫고 나면 삶은 조금 더 소중해진다.
"우리는 매일 우리를 괴롭히는 소란과 두려움, 욕망들을 잊어버리고 인생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지 생각해야 한다. 인생은 믿을 수 없는 순간이었고, 매 순간마다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선물이 담겨있었다..."
[만일 나에게 단 한 번의 아침이 남아 있다면] 이란 책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인생을 선물이라 생각하기 쉽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내겐 이 B컷 폴더에 담긴 사진들이 그날 내가 담은 모든 날들이 좋았고 놀라웠다라고 되새기게끔 하는 고마운 존재가 되어준다. 그저 실수들의 총집합이지만 모든 순간들이 의미가 있었음을, 찬란했음을 이제 나는 안다.
한 화학자가 실수로 접착력이 약하고 끈적이지 않는 물질을 개발해 우연히 포스트잇이란 것이 탄생한 것처럼 차곡차곡 모아놓은 이 'B컷' 폴더 속 사진들도 언젠간 쓰임이 있을 거라 믿는다. 과거에 실수라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시간이었음을 깨달은 데서 오는 뿌듯함은 내가 B컷들을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능했다.
내 인생의 B컷들을 사랑하자.
오늘, 핸드폰 속 채 지우지 못한 수많은 B컷들의 순간 중 하나를 공유하기 좋은 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