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걸음
항상 밖으로 카메라를 들고나가 촬영을 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어느 날 부턴가는 실내에서 편안하게 촬영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촬영을 하고자 하는 반려인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나의 부탁에 지인은 회사 전체에 메일을 뿌려 사진촬영을 하고 싶은 동료 직장인을 소개해주었다. 난생처음 만나는 사람을 찍는 일이야 지난 몇 년간 매일 해 온 일이었기에 낯설 것 하나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반려인의 집에서 촬영을 하기로 한 것이다.
'띵동-'
문이 열리자 두 마리의 큰 대형견들이 꼬리를 흔들며 낯선 이를 맞이했다. 그 뒤로 반려인인 레이나와 남편이 나타났다.
"어서 와요."
짧은 인사를 마치고 곧바로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촬영은 거실과 침실, 복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장 세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마침 운 좋게도 촬영 끝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에 우리는 모두 신이 나 마당에서 어린아이들처럼 뛰어놀며 즐겁게 마지막 컷을 남길 수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촬영이었고 수월하게 끝난 촬영이었지만, 나는 그간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며 담아왔던 짧은 만남들에서는 채 느낄 수 없었던 무언가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훈련이 정말 잘 되어있구나.'
직접 집에 찾아가 만나본 그들의 반려동물을 키우는 방식과 태도에는 '개는 개답게'라는 것이 많이 묻어있었다. 쉽게 말해 그들이 반려동물을 대하는 방식에는 과함이 없었다. 반려동물의 의사에 관계없이 과하게 만지거나 안거나, 우쭈쭈- 하는 법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무미건조한 반려동물을 대하는 태도가 자칫 조금 정이 없어 보일 순 있지만, 올바른 훈련법에도 나와있듯 너무 과한 사랑을 표하게 되면 자칫 반려동물이 보호자보다 우위에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지양해야 한다. 그들의 다소 건조한 사랑법이 옳았던 것이다.
촬영이 끝나고 다시 맨해튼으로 향하며 (다소 문화충격에 가까웠던) 이 새롭게 보고 배운 문화를 계속해서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말로 설명하기 참 애매한 무언가였다. 그동안 한국에서 반려견을 키우던 방식이나 태도와는 사뭇 다른 절제된 그들의 방식은....
'절제된.. 사랑?'
이 정도의 단어가 가장 적절할 것 같았다.
이후 다른 여러 반려인들의 집을 방문해 그들과 그들의 반려동물의 사진을 찍으면서도 나는 매번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들에게 있어 반려동물은 '잘 훈련시키고 보살펴야 할 존재'였다. '귀여워 죽겠는 존재'에 좀 더 치우쳐있는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반려동물을 대하는 방식과는 확실히 그 접근법이 달랐다. (이것 참 글로 전달하려니 말만 장황해지고 쉽지 않다.)
모든 훈련사들과 행동교정사들도 "반려동물은 사람이 아닙니다."라든가 "개답게, 고양이답게 키우세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예를 들자면, 밥을 먹을 땐 보호자가 먼저 먹고 나서 먹도록 한다던가, 사람음식을 탐내지 않도록 훈련한다던가, 어린아이를 향해 짖지 않도록 한다던가, 너무 사랑을 많이 줘서 기고만장하지 않게 한다던가, 물고 빨고 하는 '귀여워 죽겠는' 행동들은 반려동물이 이해하지 못하므로 자제한다던가 하는 등이 있겠다.
다시 말해, 반려동물을 의인화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건너서는 안될 강을 건너버린지 오랜 것 같다.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들을 제대로 통제하려는 마음보다 커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이 얼마나 많은지. 길에서 만난 반려인들 중, 혹은 지인 반려인들 중 반려동물을 실제 사람 아이처럼 대하는 이들도 한두 명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일부 반려인들 중 반려동물에게 '우리 애-'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그렇다. 물론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 훈련을 올바로 시킨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 그들의 반려견을 사랑하는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할 순 없지만 뭐든 과하면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얼마 전 나의 반려견 '포레'와 함께 들른 동물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말 아침이라 대기가 길어 한참을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두 반려인들의 대화가 흥미로웠다.
"걔는 어디가 아파요?"
"피부병이 심해요."
강아지가 피부병이 심하다며 아주머니는 한 손엔 물티슈를, 한 손엔 작은 몰티즈를 들어 안고는 말하셨다. 그걸 본 질문한 아저씨는 아주머니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거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좀 더럽게 내버려 두어도 보고 신경 덜 쓰면 자연스럽게 나아. 인간이 자꾸 그렇게 안아대고 닦아대고 해서 병이 나는 거지, 원래대로 두면 괜찮아져요."
나는 저렇게 현명한 답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져 아저씨를 한동안 관찰했다. 노견을 기르는 평범한 반려인이었다. 13살이라던 아저씨의 시츄는 꽤나 건강해 보였다.
실제로도 어느 정도 그분의 말씀은 일리가 있다. 반려견의 청결을 사람처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어느 정도 세균에 노출이 되어야 완전무결한 것보다 더 건강히 살 수 있는 것처럼 반려동물을 향한 과한 관심은 오히려 없는 병을 불러올 수 있다. 아저씨는 과한 사랑은 독이 된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리 떳떳한 반려인은 아니다. 뉴욕에서 반려인들과 함께 촬영하고 그들의 집문을 나설 때 항시 느꼈던 그 낯선 이질감 속에는 나의 반려견을 향한 조금은 일그러진 사랑에 대한 부끄러움이 항상 함께였다. 몰랐겠다면 평생 몰랐을 테지만- 알아버린 지금은 그래서 매일 부끄러워하면서 나의 반려견과 한 침대에서 자고 밥도 같이 먹는다. (웁스..!)
훈련사들에게 한소리 듣기 딱 좋다. 그뿐인가. 나의 반려견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캐릭터를 만들어 나의 회화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아니- 사실은 너무 사랑해서라기 보단 포레가 갖고 있는 이야기를 많은 이들에게 전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겠다. (이 부분은 잊어주시길.)
어쨌거나 이미 건너선 안될 강을 건너버린 나와 같은 많은 반려인들에게 전하고 싶다. 건너버린 강이지만,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은 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개는 개답게 키워야 한다고. 나도 잘 못하지만, 정말 잘 못하지만 그래도 사람들과 섞여사는 세상이니 자중해야 한다고. 적어도 그 정도는 반려인으로써 당연히 해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 사람들 보단 조금 더 사랑을 주자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정말 반려동물답게 키우는 와중에 조금만 더 사랑을 주면 어떨까? 뉴욕 반려인들에게서 느꼈던 반려동물을 향한 다소 건조한 사랑보단 1-2% 정도의 사랑의 물약을 한 방울 톡 떨어뜨린 좀 더 촉촉한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뉴욕의 접근법과 우리의 접근법, 그 사이 어딘가에 있기 위해 오늘도 부단히 노력하는 못난 반려인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