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웃는 얼굴 뒤에 악마가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
내 아이라도 정말이지 저런 생각이 스쳐갈 때가 있다. 악마가 별건가? 정말 말이 안 통해 억울하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심지어 내 자식이니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상황.
그래도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 아이의 예쁜 모습, 멋진 모습, 가끔은 영재 아닌가 싶을 정도의 행동들이 끝도 없이 터져 나오지만, 그래도 사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저런 생각을 한다.
"도대체 넌 누굴 닮아서 그러니?"
그렇게라도 위안을 얻으려, 신은 엄마와 아빠 둘을 아이들에게 내려준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저런 원망이라도 하면서 투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누구든 닮았겠지만, 나를 닮는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인정하기 싫어도 그렇다.
세 아이를 키우다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간다. 아이는 세명이고, 부모는 두 명이니 늘 허점이 있게 마련이다. 첫째가 젤 큰 아이이니 알아서 하라고 할 수도, 막내가 어려서 말을 못 할 땐 말 못 해서 존재감이 떨어지면 어느새 또 손이 안 갈 때가 있다. 아이들이 점점 크면서 느끼는 건 태어나서 지금껏, 첫째가 제일 손이 간다. 손이 많이 갔던 아이라 계속 손이 간다.ㅠㅠ 막내는 손이 첨부터 잘 안 가서 그런지 어떻게든 알아서 하고 있더라.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형제든 남매든 서로 닮기 마련이다. 외모든 성격이든 비슷하기도 하고, 그래도 적어도 외모는 많이 닮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세명이 정말 서로 외모가 너무 다르다. 다른 사람들이 같은 애들인지 인식하지 못할 정도이다. 외모가 그러니, 성격이야 오죽할까? 정말 성격조차 너무도 다르다. 누굴 닮았냐고 할 겨를도 없이 어느 순간이 되니 우리가 그걸 받아들이고 있다.
누굴 닮았냐고 핀잔도 주고, 넌 왜 그러니? 하고 원망도 할 법 하지만, 부모가 일대일로 아이를 상대할 수 있는 물리적 정신적 범위를 초과하면, 어느새 내가 판단하고 생각하기보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을 깨닫는다.
어찌 보면,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봐줘야 한다고 그렇게 교육에서든 책이든 쓰고 있지만, 정작 그게 어떤 건지도 모르게 그런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육체적 정신적인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서, 부모도 살기(?) 위해 뭔가의 방법을 강구하는 것 같다. 그야말로 아이를 판단하고 강요할 시간조차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세 아이를 그렇게 바라보게 되면서 육아의 근본적인 스트레스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웃는 얼굴 뒤에 더 아름다운 뭔가가 있을 거라는 믿음. 믿음이 흔들릴 때도 다시금 부여잡을 수 있는 그 무언가. 물론 그 사이에 애들도 많이 컸다.
처음엔 정말 아이의 매 행동에 대해 내 아이는 왜 그런가?라는 의문에 휩싸일 때가 많았지만, 아이들이 하나 둘 태어날수록 느껴지는 '정말 다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왜 그러는지'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모의 입장에서 부모의 거울로 자꾸 비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과정 말이다. 부모를 닮아 자식에 대한 애착이 더 생기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잘못된 집착이 생길 수도 있는 것 같다.
왜? 라는 의문은 '아이들이 왜 나의 생각 데로 안되는가?'의 생략 어이다.
객관적인 상황에서 뭔가 잘못되거나 이상한 행동에 의문이 아닌, 그냥 극히 주관적인 육아를 하는 '나'의 생각과 기대데로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것, 그 왜?이다.
내 아이는 자신의 성향과 나이에 맞는 욕구를 찾아 자라고 있다. 이제 '내 아이만 왜 그런가?'의 의문보다는, 내 아이가 지금껏 잘 자라준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앞으로도 더욱 성장할 아이의 동반자이자 울타리가 되어줄 나의 숨겨졌던 소중한 자존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