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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Jul 22. 2018

엄마: 미래의 여행 메이트

이따금 엄마에게 듣는 말이 있다. 방을 지저분하게 해놓고 안 치웠을 때 그리고 TV를 보며 나오는 곳마다 가고 싶다고 말할 때, 엄마는 말씀하신다. “넌 대체 누굴 닮아 그러니.” 때로는 눈을 흘기고 때로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두 가지만큼은 엄마와 나, 전혀 다르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집안에 먼지 하나 굴러다니지 않았다. 우리집은 언제나 모델하우스처럼 정돈돼있었다. 반면 나는 청소에 있어선 조금 여유로운 편. 늘어놓고 있다 눈에 거슬릴 때쯤 치우는 스타일이다. 대부분 내가 거슬리기 전에 엄마가 치운다는 게 문제지만.      


다른 하나는 여행. 언제부턴가 나는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 (활동을 제대로 하진 않았지만) 여행 동아리에 들어갔고, 여름과 겨울엔 ‘내일로’ 티켓을 사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휴학하고 돈을 벌어 세계일주를 가겠다고 스터디까지 했다. (실천에 옮기진 못했지만) 엄마는 이런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어릴 때부터 여행과 거리가 멀었다. 멀리 나가길 귀찮아하는 아빠 때문인지 차멀미가 심했던 나와 동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 여행 추억이 많진 않다. (어릴 때 장거리 버스에서 둘이 번갈아 가며 토를 하는 바람에 엄마가 고생했단 얘길 아직도 듣는다. 심하긴 했나보다)      


엄마가 내게 “방 좀 치워”라고 하는 만큼, 나는 엄마에게 “같이 여행가자”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엄마와 단둘이 서울 밖으로 나간 건 고등학교 때가 마지막인 것 같다. ‘이번엔 가보자’ 다짐하며 둘이 가는 여행이나 가족 여행을 여러 번 알았지만 매번 포기했다. 이 집에서 적극적인 건 나 하나뿐.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은 가족여행은 조금은 ‘일’처럼 느껴졌다. 알아보다 지친 나는 결국 혼자서 여행을 떠나곤 했다.        



@이른 아침 프라하 카를교


왠지 프라하는 엄마와 여행하고 싶었다. 유럽 여행 중 엄마와 자식이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부러웠다. 일정과 비행시간 등을 고려했을 때 동유럽 정도면 올 만하지 않을까. 수차례 엄마에게 얘길 했다. 처음 흘리듯 말을 꺼냈을 땐 엄마도 긍정적이었다. 시간이 흘러 진짜 비행기 표를 끊어야 할 순간이 되자 엄마는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괜히 내가 가면 너 가고 싶은 곳 다 못 가서 여행 망친다” “엄마는 그렇게 오래 비행기 못 탄다” “말도 안 통하는데 공항에서 어떻게 하느냐” 등 프라하에 못 올 이유가 점점 늘어났다. 그냥 비행기만 타고 오면 다 책임진다는데 왜 못할 것 같다고만 하는지 답답했다. 그리고 속상했다. 세계 어디에 가도 두려움 없이 잘 적응하며 다닐 수 있도록 날 키워준 엄마인데, 그동안 엄마의 세계는 좁아진 것만 같아서.      


혼자 도착한 프라하는 김빠진 콜라처럼 매력이 없었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을 본 이후 연하게 환상을 품고 있었던 도시였는데. 부활절 연휴라 거리는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해 정신이 없었고, 프라하 사람들이 내게만 불친절한 것처럼 느껴져 서러웠다. 베드버그와 사투를 벌어야 했던 분노의 시간도 거쳐야 했다. 프라하가 어땠느냐고 묻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늘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상황에 만약 엄마가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 도시는 이번 여행 중 내 최고의 여행지가 되었을까?     


여행에 별 흥미가 없는 엄마지만 성지순례만큼은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그 얘길 계속 들어왔기에 환갑여행으로 꼭 성지순례를 보내주겠다고 다짐해왔다. (그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아 왠지 슬프다) 핑계 삼아서라도 그때 가지 못하면 성지순례가 계속 엄마의 ‘꿈’으로 남아있을 것 같아서 등 떠밀어서라도 보내주고 싶다.      


성지순례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우연히 성지 몇 곳을 들르게 됐다. 엄마가 왔으면 정말 좋아했을 곳들을. 이집트 다합에 갔을 땐 시내산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바로 그 곳이다. 다합에 비교적 오래 머물러서 하루쯤 투어로 산을 오를 수도 있었지만 다이빙 후엔 질소가 몸에 쌓여 바로 산에 오르면 안 된다는 논리로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지척에 두고 가보지 못했다. 힘든 산행길이라지만 왠지 엄마가 여기 있었더라면 내 옆구리를 찔러 날 끌고 올라가지 않았을까.      


카이로에선 올드 카이로에 갔다 ‘아기예수 피난 교회’에 들렀다. 헤롯왕 박해를 피해 도망 온 성모마리아, 요셉 그리고 아이 예수가 머물렀던 곳. 피난하던 동굴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교회 지하로 내려가면 이들이 머물렀던 공간이 나온다. 설명 없이 들어갔으면 감흥이 없었을 공간인데, 수천 년 전 흔적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에 쉽게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아기예수피난교회. 지하로 내려가면 성가족이 머물렀던 동굴과 그들이 마셨다는 우물 흔적이 남아있다.


셀수스 도서관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찾아간 터키 에페소에서도 기독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름부터 에베소.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서신 ‘에베소서’의 그 에베소 아닌가. 그토록 궁금했던 셀수스 도서관에선 바울이 2년 동안 예수 이름을 전하며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이적을 행했다고 한다. 또 한명의 사도, 요한 역시 이 도시에 머물렀다. 예수는 돌아가시며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했다. 에페소엔 성요한 교회와 성모 마리아의 집이 남아있다.      


성지를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고 즉시 엄마에게 연락을 했다. 함께 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의 한 조각이라도 나누고 싶은 마음 그리고 엄마와 왔더라면 성경 이야기를 들으며 이 공간에서 더 의미는 사유를 할 수 있었으리란 아쉬움 때문에. 평소엔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 구경하기 바빠 (죄송하지만) 부모님은 뒷전이었다. 매번 엄마가 ‘딸 잘 지내? 지금은 어디?’ 메시지를 보낼 때에만 답을 하곤 했다. 얼마나 애가 탔을까. 카톡을 보내놓고 바로 답이 없는 엄마를 기다리는 것도 애가 닳았는데.        


   

에페소의 셀수스 도서관(좌)와 성 요한 교회. 성요한 교회는 문을 닫아 들어가질 못해 밖에서만.


@쓰레기마을로 불리는 이집트 카이로의 모카탐 '동굴 교회' 박해를 피해 기독교인들은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얼마 전 엄마와 <꽃보다 할배>를 보는데 엄마가 TV 속 화면을 보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겐 익숙한 풍경이었다. 해질녘 프라하 카를교의 모습. “엄마 저기가 거기야. 내가 같이 여행하자고 했던 프라하.” 뾰로통해져 살짝 쏘아붙였다. 나만 본 풍경이 아니라 함께 본 풍경이었다면, “저기 어디야” 묻지 않고 “여기 우리 갔던 곳이다” 말하며 추억 여행하듯 이 프로그램을 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와 여행을 가지 못한 것이 또 한 번 안타까웠다.      



@엄마와 함께 보았으면 좋았을 풍경


여행을 떠나기 전 엄마가 전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퇴사하고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동생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겠단 폭탄 두 개를 부모님께 던진 때였다. 아빠와 엄마는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대활 나눴다고 했다. “우리 애들은 누굴 닮아서 그렇지? 당신도 나도 그렇지 않은 거 같은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길 바라는 게 큰 욕심인가?” 커피를 다 마실 즈음 두 분은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자신들도 원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아등바등 살다보니 좋아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하고 싶은 데 뭔지 잊고 살았던 게 아닐까 하고. 엄마는 “니네 덕분에 우리의 진짜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 방랑벽은 부모님으로부터 온 것일지도 모른다. 엄마의 내면 저 구석 어딘가엔 봉인된 방랑벽이 남아있을지도. 다음번 여행은 꼭 엄마와 갔으면 좋겠다. 여행 메이트로서의 엄마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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