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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Jul 08. 2018

인연: 여행이기에 가능한 만남

지난 여행을 곱씹다보면 많은 얼굴이 떠오른다. 길을 걷다 도움의 손길을 건넨 사람들, 갑작스럽게 내게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던 이들, 풍경 속에 그림처럼 들어가 있어 몰래 훔쳐보았던 얼굴들, 숙소에 같이 머물렀던 사람들. 정확한 생김새는 기억나지 않지만 스치듯 지나간 그들의 모습은 그 도시의 장면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급은 아니어도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들은 각각이 각각의 이유로 모두가 강렬했다. 평생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길 위에서 여러 번 마주하게 될 땐 더더욱.      


포르투갈-스페인-모로코 여행 중엔 끊어진 것 같았던 만남이 자꾸만 이어졌다. 스쳐갔던 이들이 내 곁을 계속 스쳐갔고, 기약 없는 만남을 약속하며 헤어졌던 이를 예상보다 빠르게 만나게 되기도 했다.      



나의 여정은 이랬다. (포르투갈) 포르투-리스본- (스페인) 세비야-그라나다- (모로코) 탕헤르-쉐프샤우엔-페스-메르주가-마라케시


시작은 포르투 렐루서점. 해리포터 작가 J.K.롤링이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유명해진 서점이다. 덕분에 이곳엔 언제나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나 역시 그 중 하나. 읽을 수 없는 포르투갈 책들을 둘러보다 포토 스팟(?) 근처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보통 혼자 온 사람에게 상부상조를 제안하며 사진을 부탁하는데, 유독 혼자 온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고민 끝에 한국인 커플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즐거운 여행되세요” 인사를 건네고 돌아선 커플을 리스본에서 세비야로 가는 야간버스에서 만났다. 신기해하며 헤어진 그들을 호스텔 로비에서 또 마주쳤다. 인연은 모로코에서도 이어졌다. 페스에서 사막마을 메르주가로 가기 위해 버스터미널에 앉아 있을 때 동양인 커플에 눈길이 갔다. 그들이었다.      


같은 호스텔에 묵으며 안면을 튼 이들을 다른 도시 호스텔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라나다 호스텔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새로 온 이들이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하고 다시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한 톤 높은 “Hey! I know you”란 말이 들려왔다. 얼굴을 자세히 봐도 누군지 알 길이 없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세비야 호스텔 화장실!”이란 답이 돌아왔다. 한 장면이 머릿속에 재생됐다. 찬물만 나와 덜덜 떨며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 씻으러 들어갔다 당황해하며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던 친구들이었다. 이미 옷을 벗고 샤워 준비를 마친 이들을 대신해 나는 리셉션에 내려가 한 두 시간 뒤 따뜻한 물이 나올 거란 사실을 확인해 전달해줬다. 잠깐의 인연을 기억해준 것이, 또 내게 말을 걸어 날 알고 있다고 말해준 것이 고마웠다.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도착했던 모로코의 첫 도시 탕헤르에서 만난 제니도 특별했다. 짧았지만 처음으로 여행지에서 만나 동행한 여행자였다. 나보다 며칠 앞서 모로코에 온 제니는 막 도착한 내게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고 제안했다. 호객행위가 심한 모로코의 어둑한 골목을 홀로 나가는 게 조금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그녀가 전날 가봤다는 식당에서 만족스러운 첫 끼를 먹을 수 있었다. 다음날 쉐프샤우엔으로 떠나기 전 아침을 먹고 그녀와 동네 골목을 거닐었다. 그리고 헤어지며 “며칠 뒤 쉐프샤우엔에 가는데 기회가 되면 만나자” 조금은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연락처를 주고받진 않았다.      


셰프샤우엔 마지막 날, 며칠 동안 헤매고 다니며 익숙해진 골목길을 걷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지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날 줄이야. 친구들과 함께 있는 그녀와 “진짜 만날 줄은 몰랐다” 잠깐 대화를 하고 그대로 헤어졌다. 아쉬움을 남긴 채. 다음날 아침 다음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짐을 싸고 있는데 반갑게 인사하며 제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또 같은 호스텔에 묵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떠나고 나면 내가 묵었던 방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바로 떠나야 함을 아쉬워하며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헤어졌다. 

로맨틱하게 말하면 ‘인연’이고 건조하게 말하면 여행 루트가 같았을 뿐인 사람들. 조금 오글거려도 나는 이들 모두를 인연이라 부르고 싶다.       



인연이 이어지게 만들어준 호스텔 그리고 세비야 호스텔에서 참여한 빠에야 클래스




     

혼자 여행했다고 하면 외롭지 않았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그럴 때마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는 경우가 많아 괜찮아요”라고 답하곤 했다. 답을 듣는 사람들은 내가 적극적이고 활달한 사람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차분하고 낯을 가리는 편이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걸 땐 여러 번 망설이고, 할 말은 여러 번 머릿속으로 되뇐 뒤 겨우 꺼내곤 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대부분의 동행들은 감사하게도 내게 먼저 말을 건네 준 이들이었다.      


모두가 나의 여행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줬지만, 이과수폭포 여행에서 만난 이들은 좀 더 특별하고 완벽했다. 


이과수 폭포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에 걸쳐 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오가며 이과수 폭포를 즐긴다. 시간이 촉박해 한 곳밖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둘 중 어딜 가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지곤 한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느냐, 전체를 조망하느냐의 차이.      


아르헨티나 쪽을 먼저 가보기로 했다. 국경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1.5리터 물병을 든 한 남자가 “여기가 이과수 가는 버스가 서는 곳이냐”고 물어왔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전날 보러 갔는데 비가 많이 와서 결국 돌아왔다”며 “오늘은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동행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어가 영어가 모두 가능한 그는 내게 구세주였다. 남미에선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 벼락치기 공부를 했지만 바로 의사소통이 가능할리 없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는 첫 나라. 아르헨티나 터미널에 내려 폭포까지 가는 버스표를 사고, ATM을 찾아 아르헨티나 돈을 뽑는 과정에 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시간이 두 배는 걸렸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전날 왔다가 허탕을 치고 갔기에 길을 다 알고 있었다. 갑자기 여행이 개인 가이드 겸 통역사를 대동한 여행으로 격상되었다.      


프랑스인인 그는 남미에서 오랫동안 파견 근무를 했다고 했다. 그래서 스페인어를 잘한다고. 휴가를 맘껏 쓸 수 있는 프랑스 얘긴 이미 여행을 하면서 만난 프랑스인들에게 많이 들어왔다. 심지어 그가 다니는 회사는 3개월이나 휴가를 준다고 했다. 여행을 위해 회사를 그만 둔 나로선 “그 정도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아도 될 것 같은대?”란 의문을 제시할 수밖에. 그는 “나이가 드니 가족들이 그리워. 이제 해외 근무 말고 가족, 친구들과 언제든 함께 할 수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라고 말했다.      


즐거운 대화 덕분에 지겨울 틈이 없었다. 풍경은 멋있었지만 반나절 동안 공원을 혼자 돌아다녔다면 조금 심심했을지도 모른다. 내 독사진 하나 건지지 못했을 것이다. 물방울이 싸락비처럼 내리고, 방심하다간 채찍비에 흠뻑 젖을지도 모르는 폭포 근처에서 모르는 사람을 불러 세워 사진을 부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이과수 폭포 그리고 브라질 쪽 이과수를 함께 여행한 친구


하루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새로운 여행자가 도착해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이과수폭포 얘기가 나왔다. 시간이 없어 둘 중 어디에 가야할지를 묻는 그에게, 아직 한 곳만 다녀온 나는 제대로 조언을 해줄 수 없었다. 대신 오늘 가봤던 곳이 좋았고, 내일은 브라질 쪽 폭포에 가본다는 얘기만. 그러자 그는 함께 해도 좋겠느냐고 제안했다.      


다음날 아침 전날 갔던 버스터미널에 가 이번엔 브라질 이과수 폭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포르투갈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 나는 손짓 발짓 대신 동행자의 도움을 받았다. 에콰도르 출신인 그는 브라질에서 공부를 해 포르투갈어가 가능했다. 잘은 못하지만 영어도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만큼은 할 줄 알고. 난 또다시 개인 통역사를 대동한 여행을 하게 됐다.      


전날 폭포를 실컷 보았는데도 또 새로웠다. 자연이 만든 거대한 물줄기가 기분을 상쾌하게 하면서도 또 두렵게 만들었다. 저 물줄기에 휩쓸리면 어떻게 될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 때문에. 한편으론 놀이동산에 놀러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폭포 가까이에 난 길을 걸어가기 전엔 단단히 준비를 해야 했다.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집까지 뛰어가기 전처럼. 바람막이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모자를 뒤집어 쓴 채 길로 뛰어 들어갔다. 롤러코스터라도 탄 듯 하이톤의 비명을 지르면서. 무지개는 또 어쩜 그리 흔한지. 이과수폭포에서 평생 볼 무지개를 다 본 것 같다. 폭포 위로 무지개가 뜰 때면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다. 



여행지에서 평생 인연을 만난 사람들, 반대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여행을 망친 사람들 얘기를 모두 들어보았다. 나도 전자와 같은 여행을 할 수 있기를. 막연히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지에서 평생 추억을 곱씹을 친구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지만 비슷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어딘가 통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생각보다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함께 할 때 즐거웠어도 여행 루트가 갈리고, 삶의 터전도 다른 이들과 꾸준히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이.      


지금에 와서는 바란다. 내가 가끔 그때의 여행을 떠올리며 그들을 기억하고, 사진을 넘겨보다 그 풍경 속에서 그들과 함께 했던 장면을 즐거움으로 회상하는 것처럼, 부디 그들도 낯선 동양인과의 짧은 동행을 즐거운 추억으로 간직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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