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초의 순간이라도 피우기 위해
스무살 때부터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언니가 한 명 있다. 우린 자주 보지 않았지만, 만날 때마다 영혼이 울리는 시간을 보냈다. 언니와 나는 어느 고깃집에서 소주 한잔 기울이며 서로의 꿈과 좌절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고, 언니네 집에 가서 하룻밤을 묵으며 나의 상처받은 영혼을 달랜 적도 있었다. 우리는 몇 년동안 보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연락이 닿을 때마다 봤고, 서로의 영혼을 보았다.
작년, 그러니까 2022년 5월이었다, 언니를 다시 만난 건. 4년 만이었다. 이상하게도 인생에서 내 마음이 크게 요동치는 변화의 순간이 오면 언니가 떠오른다. 옥천의 한 마을에서 알콩달콩한 가정을 이루어 사는 언니의 연락처를 찾아, 연락을 했다. 언니는 5월에는 집 마당에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모습을 드러내니, 그때 놀러오라고 했다.
운전을 해서 가는 3시간 내내 어쩐지 깊고 깊은 외지로 흘러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사실이기도 했지만, 그 깊고 깊은 외지가 나의 심연으로 흘러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언니가 자리잡고 있는 터전은 참 평화로워 마음이 편안해 지는 그런 곳이었다. 처음 방문해 본 조그만 마을이었는데 어쩜 이렇게 마음을 놓일 곳곳이 보이는 걸까.
조그만 동네이지만 언니는 내게 같이 가보자고 하며, 어느 절을 데리고 갔다. 큰 저수지 옆길을 따라 차를 굽이굽이 운전해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다를 바 없는, 약간 높은 고도에 위치한 산 속의 여느 절이었는데, 절의 기운이 굉장히 묘했다. 알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나를 압도하는 느낌. 어둡거나 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밝거나 선하지도 않은 그런 공기였다.
절간에 들어서서 불상을 마주하고 나란히 앉아, 눈을 잠깐 감았다. 갑작스러운 침묵과 고요, 순식간에 나는 내 마음의 블랙홀 한 가운데에 놓여있었다. 자각하지 못 하는 새에 무언가가 나의 중심을 탁 치고 갔고, 눈물이 나왔다. 설명할 수 없는 무거운 공기가 나의 육체를 누르고, 반대급부로 나의 마음이 불상 앞에 처연히 놓여버린 순간이었다.
그 순간 언니의 아들이 절에서 뛰쳐나가는 바람이 우리는 함께 절 밖으로 나갔다. 절 안에 있었던 건 아마 채 1분이 되지 않았을거다. 절 밖에서 나가 언니에게 처음 내뱉은 말은, “언니, 나 연기하고 싶어.”였다.
스스로도 놀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회사에서 콘텐츠 CP 역할을 수행하면서 다음 커리어를 구상하고 있던 차였다. 생뚱맞게 연기하고 싶다는 말이 왜 터져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말갛게 웃고 뛰어다니며 활짝 피어 있는 언니의 아들을 보아서일까, 흐드러지게 핀 마당의 장미를 보아서일까. 나도 몰랐던 나의 진짜 열망을 이미 언니가 알아보고 있어서였을까.
“얼마나 그동안 뜨거웠니, 속에 품고 있느라.” 내 말을 들었던 언니가 해 준 말이었다. 피어나는 일련의 모든 생명체들을 보면서, 어쩌면 혼을 위로해 주는 생사의 경계에 있는 절에서, 이 시절 살고 간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단박에 생각해 보게 된걸까.
인생의 풍파를 직면한 시점에 나는 본능적으로 나를 알아봐주고 응원해 주고 지지해 줄 언니를 찾게 되었던 것 같다. 다른 길로 들어서기 위한 단 한 명의 믿음과 확신을 받고 싶었던가 보다.
내 삶은 배우로서의 꽃을 피울지 아닐지 알지 못 한다. 하지만 부단히 그 길만을 보고 걸어가려 한다. 그 길에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넘어서, 조금씩이라도, 조금은 느리더라도, 가고자 한다. 그렇게 가다보면 언젠가 한번은, 잠시라도, 단 1초의 순간이라도 꽃을 가장 아름답게 피울 수만 있다면, 그 1초의 순간을 위해서 나는 달려가고자 한다. 1초의 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꽃을 피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배우의 길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소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느낌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그 믿음 하나로, 이미 내 존재는 밝혀졌고, 충만하게 심장이 부풀어올라 가득 찬 기분을 느낀다.
그저, 1초의 순간을 위해서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