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거절과 실패에 익숙해지기
난 3번의 인턴을 거쳐 취업에 성공했다. 그 사이 몇 십 개의 자소서를 쓰고 몇 십 번의 면접을 봤는진 셀 수 없다. 채용 담당자가 보낸 이메일의 첫 문장만 읽어도 합불을 맞출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쯤 최종 합격을 거머쥐었다. 공지된 시간에 맞춰 채용 홈페이지 새로고침을 몇 백번 누르다 합격 화면을 마주했을 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기뻐서 우는 거지? 엄마는 물었다.
아니.. 그냥 해방감이 들어서. 이 바보 같은 짓을 그만해도 된다는 게..
내가 회사 생활과 맞지 않는 사람이란 건 애진작에 알았다. 9-6 이라는 틀에 박힌 생활, 가부장적 경영체제, 자유롭지 못한 조직문화. 무엇보다 난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인데 그 하고 싶은 것들이 모두 회사 밖에 있었다. 그래도 부모님 기대에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주어진 길을 탈선하는 게 두려워서,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하기 위해 인턴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취업을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다르니까 나중에 진정 내가 원하는 걸 하기 위해 우선 사회생활을 경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관심 있는 산업도, 가고 싶은 회사도 없는 상태에서 진정한 '자기소개'라곤 없는 자소서를 쓰고, 업무와 전혀 관련성을 모르겠는 필기시험을 위해 문제집을 사서 풀고, 실무/영어/AI/임원 등 끝도 없이 쏟아지는 종류의 면접에 대응하기 위해 스터디를 했다. 치열했던 과정에서 수많은 탈락을 맛봤다. 서류부터 최종 면접까지 장장 3개월을 바친 기업으로부터 최종 불합격 통보를 받은 날에는 멘탈이 탈탈 털리기도 했다. 진정 원하지도 않는 일에 이렇게 노력을 쏟아야 하다니.. 탈락의 이유라도 알고 싶었지만 채용 담당자가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곤 "귀하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모집 인원 제한으로 인해..", "안타깝게 생각하며 건승을 기원합니다"가 전부였다.
우리는 평생 '답'을 찾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 답을 찾아 외우고, 답을 맞히고, 그 결괏값으로 수치화/객관화된 지표를 얻었다. 수능이 그러했고, 학점이 그러했다. 취업에 있어서도 서류나 필기 단계에선 그들이 원하는 답과 수치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면접부턴 알 수 없다. 면접관의 질문에 어떤 게 가장 옳은 답인지, 어떤 얼굴 표정과 제스처가 그들의 마음이 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답에 가까운 답변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실제로 이를 가르치는 유튜브도 많지만) 그날 면접관들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답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결국 노력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운이라는 건데 바로 이 부분에서 많은 취준생들이 멘붕에 빠지고, 나 또한 그랬다.
모든 게 그저 운일뿐이라면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작사를 하고부턴 본격적으로 답 없는 전투에 들어서게 됐다. 작사는 무한 경쟁이다. 일단 데모를 받게 되면 내가 가능한 한 모든 곡에 참여할 수 있다. 지망생부터 전문가까지 제출한 모든 시안을 기획사에서 검토 후 최종적으로 하나의 가사를 채택한다(물론 요즘엔 여러 가사가 섞여서 나오기도 한다.) 기회가 많은 만큼 경쟁률도 높은데, 채택된 사람만 연락을 받는다. 그런데 이 연락이 기약이 없다. 시안 제출 후 일주일 안에 받은 분도 있고, 몇 달이 지나고 나서 받은 분도 있다. 픽스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가수나 소속사 사정에 따라 곡이 엎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처음엔 이 연락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힘들었다.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오매불망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고, 다른 분의 가사로 곡이 나오면 그때서야 이번에도 난 안 됐음을 알 수 있었다. 점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 어느 부분이 부족했는지, 내가 누구와 경쟁을 한 건지도 대체 알 수 없지만 기획사 A&R 및 관계자분들 혹은 가수 본인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즉, 어느 정도의 수준을 거친 이후부터는 마치 면접처럼 굉장히 주관적인 평가일 수 있다는 말이다.
발매된 곡의 가사와 내 가사를 비교하고 필사도 해봤지만, 이 영역은 사실 '정확한 답'이라는 게 없지 않은가. 이번 곡을 공부한다고 다음 곡에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엉덩이 붙이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성과가 나는 것도 아니다. 작년에 별도로 작사가 오디션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2차 불합격이라는 통보 이메일을 받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제출한 시안에 대해 간단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을지 물었으나, 따로 답변은 오지 않았다. 350명의 시안을 일일이 검토하고 피드백을 줄 시간도, 여력도 없을 것이란 건 잘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취준 때 겪은 무력감이 또다시 들었다. 심지어 기업은 면접 불합격이면 거마비라도 주지만, 작사는 채택이 되지 않으면 작업한 시간과 노동력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답답한 마음은 자책으로 이어졌다. 사실 재능이 없는데바보같이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이 시기에 작사 선생님은 이런 조언을 주셨다. 버티라고. 여긴 재능보다 운의 영역인데, 한 번 그 운을 내 것으로 만들면 다음은 좀 더 수월 할 거라고. 중요한 건 그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거라고. 그냥 버티는 게 해결법이라니. 너무 절망적이고 성의 없는 해결법이 아닌가 생각한 것도 잠시, 취준 생활이 떠올랐다. 그렇게 하기 싫었던 취준도 버텨서 해냈는데(어쩌면 더 높은 경쟁률을 뚫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기 싫은 일은 돈을 준다 해도 때려치웠는데 돈 한 푼 안 되는 이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면 그것 자체로도 재능이 아닐까.
데뷔 후에도 불안함의 굴레에서 벗어날 순 없다. 다음 곡이 나오기까지 또다시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기에. 결국 이 일을 한 번 하고 말게 아니라 오래 할 거라면 불안함은 당연하고 거절과 실패에 익숙해져야 한다. 답이 없는 답을 찾는 일을 한다는 거절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나의 길을 닦아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 한다. 연락에 목매지도 않는다. 물론 자괴감과 자기 의심에 빠져 무력해질 때가 또 오겠지만 그때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 매번 최선을 다해 시안을 제출하는 일에 집중할 것이다.
데뷔가 내 여정의 종착지는 아니다. 이 일을 제대로, 오래 하고 싶다. 그래서 더더욱 작사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마음을 편하게 갖고, 작사는 내 생의 여러 갈래 중 하나일 뿐이라 여기며 장기전을 준비한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독자 여러분께 최종 합격과 같은 데뷔 소식을 전할 날이 올 거라 굳게 믿으며 :)
오늘 조금 늦은 시간에 찾아뵙게 되어 죄송해요..! 다음에는 지망생의 또 다른 어려움 중 하나인 '외로움'에 대해 얘기 나눠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