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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루 Nov 06. 2022

죽음으로 인해 나아가는 삶

; 드라마 <언내추럴> 후기

드라마 <언내추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오래 전부터였다. 워낙 유명한 ‘절망할 시간이 있으면 맛있는 거 먹고 잘래’ 짤을 보았을 때. 마찬가지로 워낙 유명한 요네즈 켄시의 ‘LEMON’이 이 드라마의 OST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또 이 드라마의 국내판이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마다 맞아 한번쯤 봐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이 드라마를 보게끔 만든 가장 강력한 원인은 연출에 대한 하나의 정보였다.


드라마의 주인공인 미스미 미코토가 무언가를 먹는 장면이 유독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이 살아간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이야기였다.


<언내추럴>의 모든 에피소드는 ‘법의학자인 주인공이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시신을 부검하며 사인을 찾아나가는’ 흐름으로 진행된다. UDI (unnatural death investigation) 라보, 즉 부자연사 규명 연구소가 이 드라마의 주된 공간인만큼 당연히 매화 누군가의 죽음을 다룬다. 매일같이 죽은 사람을 마주하는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살아가는 이야기라니. 나는 속절없이 끌어당겨져 더 이상 이 드라마를 미룰 수 없었다.


※ 이 글에는 드라마 <언내추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상 예정이 있으신 분들은 주의해주세요!


1. 동전 떨어지는 소리

화면에 중요한 단서가 잡힐 때, 혹은 미스미 미코토가 사건의 실마리를 잡았을 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소리가 있다. 바로 ‘동전 떨어지는 소리’. 사람들이 OST 만큼이나 이 드라마의 시그니쳐 요소로 떠올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나는 <언내추럴>을 보는 내내 ‘왜 하필 동전 소리일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드라마에서 특정 효과음을 사용하는 경우는 자주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는 드럼의 심벌 소리를, <로스쿨>에서는 법봉을 내려치는 소리를 엔딩 장면에 주로 사용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역시 사건을 해결할 힌트를 얻을 때마다 고래 울음소리를 삽입했다. 각각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함께 밴드를 했고, 법정 드라마였고, 주인공에게 고래가 특별한 존재라는 점에서 그 이유가 명백했다.


그러나 <언내추럴>은 대체 왜 동전 떨어뜨리는 소리를 사용했을까? 드라마 내부에서 어느 정도는 답을 알려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끝내 힌트 하나 주지 않고 끝나고 말았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이 소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확인하려고 드라마를 다시 틀었는데, 놀랍게도 이 소리는 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처음 흘러나왔다. 바로, 제목과 함께.


1화를 재생하면 동전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화면에 흰 글씨로 적혀 있던 ‘アンナチュラル’(언내추럴)라는 글자의 마지막 끝 글자만 가타카나에서 히라가나인 ‘る’로 바뀐다.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소리, 그리고 る. 일본어에 조예가 깊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본어 동사들이 る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두 요소가 모두 무언가 시작된다는 느낌을 주었다.


장면으로는 언제 등장하는지 계속 살펴보려 했는데, 더 의미있게 다가오는 대사 하나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1화에서도 초반부, 이제 막 인물 설명을 하는 타이밍에 나오는 대사였다. 미스미 미코토가 동료 부검의인 나카도 케이에게 누가 시체를 부검할지 정하자고 말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알았어요, 동전 던지기로 하죠.”


스치듯이 지나가는 데다가, 결국 동전 던지기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은, 이 대사가 미코토가 나카도를 향해 뱉은 대사라는 점에서 유의미한 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사람은 극 중 누구보다도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를 갖고 설정된 인물이기에.


あの日の悲しみさえあの日の苦しみさえ

두 사람은 모두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었다. 그러나 미코토가 차오르는 절망 속에 앉아서도 희망을 이야기한다면, 나카도는 매 순간 크고 작은 절망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미코토가 이런 세상이기에 더욱 살아가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나카도는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느니 죽는 것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동전 소리는, 동전을 뒤집기 위해 나는 소리였다. 부검을 미코토가 할지 나카도가 할지 동전의 앞뒷면으로 정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죽음에서 삶으로, 그리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상황을 뒤집는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미코토가 극에서 발견해내는 단서들은 계속 상황을 반전시킨다. 때로는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절망일지도 모르지만, 그 뒷면엔 또 다시 희망이 있다.


의도적일 수밖에 없는, ‘절망할 시간이 있으면 맛있는 거 먹고 잘래’ 와 ‘저를 절망시키지 말아주세요’, 두 대사의 대치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언내추럴>의 명대사로 꼽는 저 대사는, 사실 마지막 화에서 등장하는 처절한 대사와 완전히 대치된다.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삶을 대표하는 미코토는, 나카도가 누군가를 죽이려 들 때 저 대사를 뱉는다. 삶이 타인의 삶을 빼앗을 때. 나는 이 말이, 미코토가 모든 죽음 앞에서 끊임없이 절망했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먹이고 재우며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고. 그리하여 자신과 같은 법의학의 종사자인 나카도가,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싸워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사실 절망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동전을 뒤집어야 하니까 말이다. 결국 희망과 절망은, 구리고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양 극단에 있으면서도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니까.


2. 사회 비판의 메시지

매화를 볼 때마다 심해로 끌려들어가는 중이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중간에 친구에게 ‘너무 무거워! 살려줘!’ 같은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한 화 한 화 볼 때마다 물에 잠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죽음을 다루기 때문이 아니었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같이 밀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1화에서는 이 시국이기에 더 유별나게 느껴지는 메르스 바이러스에 대해 다룬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1화의 핵심 소재는 SNS로 인한 사회적 죽음이었다. 그저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이 한 순간의 실수 혹은 오해로 인해 전국적으로 극악무도한 사람이 되고, 그 가족들까지 오명을 뒤집어 쓰는 것. 유족들이 이별의 슬픔조차 누릴 수 없게 하는 것.


코로나 초기에 감염자들의 동선이 공개될 때마다 도가 지나친 비난과 원색적인 말들이 온라인을 뒤덮었던 일에 대해 떠올렸다. 드라마에서는 진짜 원인이 밝혀지면서 고인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사실, 그가 정말로 메르스 바이러스의 최초 유포자였다고 한들 그런 비난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을까?


또, 페미니즘적 메시지도 계속해서 직접적으로 전달했다. 전문가로서 충분한 자격을 보유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신임을 받지 못하거나, 약물로 잠재워져 피해를 당했는데도 여성의 옷차림 탓을 하고, 여성 계층을 노리는 넷카마(온라인에서 성별을 속이는 것)를 등장시켰다. 가끔은 인물의 대사를 통해, 가끔은 연출을 통해 그러한 지점들을 명확히 비판했다. 2018년 드라마니까 5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게 없는 건 조금 속상하지만, 느린 게 변화하고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 외에도 스토리 진행 자체는 다소 클리셰적이긴 해도 미코토와 나카도의 대사로 인해 큰 울림을 주었던 7화도 인상적이었다. 학교 폭력에 대해 다루는 이야기는 워낙 많지만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폭력성만 부각하거나,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사이다 형식의 이야기가 아니어서 더 좋았다. 나는 그저 이 에피소드가 ‘학교폭력의 피해로 인해 자살하려는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데에 집중해서 좋았다. 살아도 된다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서.


그 외에도 동반자살이라는 단어에 문제 의식을 제기하는 2화, 노동자 처우 문제를 언급하는 4화 등 모든 화가 현존하는 사회 문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또, 이 드라마는 시작할 때부터 일본의 부검률이 얼마나 낮은지를 언급하는데 이 지점 역시 <언내추럴>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사회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체를 부검하는 일에서 유족이 거부감을 느끼는 일은 흔하다. 비슷하게는 사후 신체 기증에 대해서도 시체가 다 조각난다더라 등의 이야기가 괴담처럼 떠돌기도 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내내 법의학이 어째서 미래를 위한 일인지 말한다. 죽음을 규명하는 것은 사실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일이라고. 그것은 더 많은 이를 살리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끝없이 말하는 이 드라마는 그렇기에 죽음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하는 드라마가 된다.


3. 잘 먹고, 잘 웃어야 해

쿠베 로쿠로라는 인물은 의대를 휴학하고 UDI 라보에서 이제 막 알바를 시작한 캐릭터다. 어떤 맥락에서는 가장 시청자의 시선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런 쿠베 로쿠로는 1화에서 ‘법의학자들은 시체를 사람으로 안 본다’는 식의 대사를 던진다.


UDI의 직원들이 시체를 부검하다 말고 시덥잖은 농담에 다같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유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시체며 좀비를 소재로 농담 따먹기를 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절망의 순간에서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틈 없이 계속해서 해야만 하는 일들이 몰아치는 삶에서, 일상을 유지해나가려면 웃어야 한다는 것을.


이 드라마에서 ‘웃음’은 내가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먹는’ 일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먹는 일이 삶을 유지시킨다면 웃음은 삶을 윤기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삶의 무게를 환기 시키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죽음을 다루는 이들이기에 더더욱 웃음과 함께 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매일 같이 마주하는 것이지, 신성하거나 터부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반 회차에 나왔던 ‘죽음은 그저 죽음, 불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는 카미쿠라 소장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도 울림이 깊었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은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고인이나 유족에게 주어진 벌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히 찾아오는 일이고, 살아있는 자들에겐 그저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인 일이니까.


내게 이 드라마를 보게 만든 ‘먹는 연출’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드라마의 첫 장면에서 미코토가 벌써부터 사내 라커룸에 앉아 아침부터 텐동을 먹고 있어서 좀 웃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텐동을 먹냐는 동료 쇼지의 말에 미코토는 “아침이니까 먹어야지” 라고 대답한다. 농담처럼 지나가지만 이 말은 결국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 먹는다는 뜻이라는 걸 시청자들은 분명 알아챌 수 있다.


1화에서 애인의 죽음과 그 이후의 일들로 인해 상처입은 인물에게, 미코토는 빵을 내밀며 먹겠느냐고 묻는다. 그럴 기분이 아니라며 몇 번이고 거절하는 사람에게 미코토는 ‘그럴 기분이 아니니까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에 빵을 집어 먹은 인물은 이 와중에도 맛있다고, 그런 자신이 싫다고 대답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살아 있으니까. 살아 간다는 것은 괴로움이고 그속에서 우리는 자기 혐오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


‘먹는 것’은 삶을 지속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행위이다.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본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가장 챙겨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입 안에 무언가 넣고 씹어서 삼키는 행동은 감각을 자각하게 하고, 신체에 열량을 지급해 에너지를 발생시키니까.


물이 차오르는 트럭에 갇혀 당장 목전에 죽음이 보이는데도 미코토는 “내일 시간 돼?” 라고 물으며 이곳에서 나가면 자신이 한 턱 쏘겠다고,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묻는다. 살아있는 한, 살아가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이토록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 드라마의 가장 뚜렷한 메시지를 의심할 도리가 없다. 살아가라고. 계속, 살아가라고.

이것이 <언내추럴>이 어째서 처음과 끝을 같은 장면으로 맞추어놓았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1화의 첫 장면과 똑같이, 10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미코토는 라커룸에서 텐동을 먹는다. 매일같이 죽음을 마주하는 미코토는 매일같이 무언가를 먹는다. 그로 인해 계속해서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것

결국 이 드라마는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해 말한다. 당연한 일이다. 앞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죽음에 대한 모든 절차는 결국 산 자들을 위한 일이다. 죽은 자는 더 이상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무엇도 대답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우리의 몫이다.


살아가는 일이 점점 더 버겁기만 한 세계에서 필사적으로 다정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보면 결국 생각해버리고 만다.


그래, 살아야지. 살아가야지.


솔직히 말해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자신은 없다. 나는 미코토보다는 나카도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매 순간 절망을 마주하고, 냉소하고, 때로는 좌절과 절망에 익숙해지는 사람. 물론 나는 일하는 내내 폭언을 달고 살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때마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푹 자고 일어나서, 다시금 살아갈 수는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절망하면 어때.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 내 동전을 뒤집어줄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나의 소중한 사람들도, 그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가 그들과 함께 먹고, 웃고, 그들의 동전을 뒤집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뭐, 내게 딱히 소중하지 않은 누군가들까지도, 전부 그랬으면 좋겠다고 조금쯤은 바란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도 살아있으니까.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은 언제나 삶이고, 그것은 오늘도 계속해서 지속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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