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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루 Sep 05. 2023

내가 오롯한 나일 수 있게

; 뮤지컬 <HOPE>  후기

  이 극을 사랑하는 한 친구는, 이 극을 추천하며 다소 불안해했다. 내가 이 극을 좋아할지 잘 모르겠다는 이유로. 극을 보고 불호라고 생각하는 일이 많지 않았던 나로서는 왜 그런 걱정을 하나 했는데 초반부를 보며 약간은 알 것 같았다. 극의 주인공인 에바 호프는 괴팍하고 성격 나쁜, 동네에 하나쯤 있(어야만 하)는 미친년이고, 이 극은 그 부분을 적나라하게 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쓴다. 호프의 내면과 호프에 대한 관중의 평가는 관객을 향해 산발적으로 쏟아진다.


  그래서일까, ‘현대 문학의 거장 요제프 클라인의 미발표 원고를 독점하고 있는 에바 호프와 그에 반박하며 법정 싸움을 벌이는 이스라엘 도서관’이라는 큰 구조를 명확하고 빠르게 설명하는 데에 반해, 에바 호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과정이 썩 친절하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이 뮤지컬의 부제가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 불친절함이 의도적 결과물이라는 생각 또한 들기 마련이다.



※ 해당 지점부터는 뮤지컬 <HOPE>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뮤지컬 <호프>에는 전환 지점이 세 번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트럭 안에서 울려퍼지는 총성이고, 두 번째는 방청객이 호프에게 내뱉는 그 원고를 읽어본 적이나 있냐는 외침이며, 세 번째는 나 좀 살자는 호프의 처절한 토로이다.


  첫 번째 전환점은, 이 극의 가장 주요한 갈등의 시작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안전한 곳으로 가리라고 믿었던 트럭의 행선지가 수용소임이 밝혀지는 순간 관객은 저도 모르게 이들의 삶을 예측하게 된다. 원고를 지키는 일이 순탄치 않으리라고, 그리고 이들의 삶 역시 그러하리라고. 총소리 이후로, 관객은 극의 초반부에 등장했던 불친절함은 뒤로 밀어두고 호프의 고통과 상처에 몰입하게 된다. 결국 관객은 호프가 말하는 '너희는 이 원고 가질 자격 없어!'라는 호통에 공감하기 시작한다.


  노인이 된 호프와, 어린 호프의 배치는 그런 의미에서 탁월하다. 우리는 종종 상처를 곱씹는 과정에서 더 큰 상처를 받는다. 상처받는 순간의 자신을 바라보는 호프의 모습은, 관객의 마음을 앓게 하기 충분하니까. 뮤지컬 <호프>는 엄마에게 상처받는 딸과, 그럼에도 엄마를 닮아가는 딸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노인이 된 호프의 모습은 딸에게 상처를 주던 마리와 닮아 있다. 그것을 호프도, 관객도 모르지 않는다.


  캐릭터에 동화되어 흘러가는 관객의 몰입이 의도적으로 깨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전환점이다. '그 원고를 읽어본 적이나 있냐'는, 호프의 폐부를 꿰뚫는 물음. 총소리가 극의 무게를 순식간에 뒤바꾸고 관객을 극으로 끌어당기는 지점이라고 한다면 그 외침은 극을 관객에게로 끌어다놓는다. 그 질문은 단순히 호프에게만 던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뮤지컬 <호프>에서 원고는 인생이다. 읽히지 않은 책은 읽히지 않은 인생이니까. 그러니 '네가 손에 쥐고 놓지 않는 게 뭔지 정말 알아?'라는 말은 곧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정말로 알고 있는 게 맞아?'라는 뜻이다. 호프는 아마 이 질문을 '너 정말 네 인생을 살고 있어?'라는 말로 들었을 것이다. 호프는 누구보다도 살고 싶었고, 그냥 살고 싶은 게 아니라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나 역시 생각했다. 그러게. 나는 잘 살고 있나? 


  이 극에서 가장 좋았던 지점은, 이 원고가 읽히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게 원고가 아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극을 보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가족을 놓든, 돈을 놓든, 학벌을, 직업을, 연인을, 그 무엇을 가져다 놓아도 극의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그 질문을 들을 때 순간적으로 떠올려버린 대상이 아마, 지금의 내가 내 일상을 소모해가며 끝끝내 놓지 않으려 애쓰는 나의 '원고'일 것이다. 그 대상에 가려 사실은 내가 나를 포기하고 있지 않느냐고, 극은 이름 없는 배역의 목소리를 빌려 관객에게 묻는다.


  그리고 호프는, 어쩌면 관객을 대변하여, 세 번째 전환점에서 대답한다. 나 좀 살자고. 사실 그것이야말로 호프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이다. 호프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고작 종이 몇 장에 불과한, 읽어본 적도 없는 원고가 아니다. 호프의 가장 강력한 소망은 언제나 '삶'이었다. 읽어본 적 없는 자신의 인생. 엄마도, 개새끼인 전 애인도 읽어준 적 없는 -읽어줄 수 없는- 자신의 인생. 나이가 78세인 노인이 되어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호프가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읽기 시작하고 나서야, 호프는 자신의 손에서 원고를 놓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려 받는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끝없이 내가 아닌 외부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에 얽매이고, 붙들려 자신의 일상을 망치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쟤가 내 인생을 망쳤어.' '쟤 때문에 내 삶은 송두리째 무너졌어!' 그러나 사실은 그 누구도 가져간 적 없다. 우리의 상처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나의 인생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니까. 상처는 밖으로부터 왔더라도, 치유는 안에서 시작되니까.


  이 극의 가장 클라이맥스에서는, 호프의 삶에 머물렀던 이들이 한 목소리로 '에바 호프'의 이름을 호명한다. 그것은 호프의 삶이 호프에게로 되돌아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극의 시작부터 수많은 사람들은 이미 끝없이 에바 호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것이 '미친년'이 아니라 '나 하나를 지키는 여자'의 이름이 된 것은 오로지 호프의 힘이다.



  호프가 원고를 단 한 번도 읽지 않았던 동안 호프의 삶을 계속해서 읽었던 것은 사실 'K', 그러니까 원고다. 재미있게도, 이 극의 중요한 포맷은 소송이다. 덕분에 필연적으로, K는 또 하나의 원고와 같은 발음을 갖게 된다. 이 소송이 열리기를 가장 바랐던 것은, 그리하여 마지막 소송에 호프를 데려가고야 마는 것은, 서사의 구조상 이 소송을 제기한 것은 바로 K다.


  이 극은, '읽히지 않은 책'이 '읽히지 않은 인생'에게 거는 소송이다. 그리고 끝내 그 원고는 판사가 되어 피고를 판결한다. 당신이 상속받은 재산은 당신 뿐이고, 그 재산은 그 누구에게도 팔아넘길 수 없고, 그러니 누구보다도 당신이 자기 자신을 잘 지켜주어야 한다고. 이 극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110분의 러닝타임을 달린다. 그리고 오로지 이 장면만으로도, 이 극은 분명 그 가치가 충분하다. 몇 번이고 들어도 부족한 말을 전하기 위해,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을 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니까.


  당신은 그저, 오롯한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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