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트라 Feb 13. 2024

사람은 절망을 겪어야 합니다.

절망에 대하여


"당신의 인생이 왜 불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누구는 그럽디다. 제 인생이 파란만장하고, 스펙터클 하다고요. 과연 제 인생을 감히 평가하는 나그네의 인생도 그리 평탄할까요?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말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고, 인간은 늘 양면적이라고요. 저는 영화를 1,500편을 넘게 본 영화 광인입니다. 그런데 늘 영화에서는 그렇게 말하더군요. 수많은 책에서 만큼이나, 개인의 인생은 그리 평탄하지 않다고요. 오늘은 절망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제 의붓오빠가 죽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절망은 인간이 깨달아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진리라고요. 그 옛날 하느님을 찬송하던 칸트를 칭송하고, 절망을 맛본 쇼펜하우어를 등한시한 그 시절, 인간은 절망을 두려워했습니다. 예, 두려워했죠. 지금도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수두룩합니다. 그 옛날, 신앙을 어렵게 서술하던 칸트를 희대의 철학자라고 말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언컨대, 그 시절의 인간은 절망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에서야 쇼펜하우어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인간들은 숨 쉴 틈 없이 절망을 맛보거든요. 그래서 그 위로를 자기 계발서에서 찾습니다.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꼬이고 꼬여야 하는지 합리화하기 위해서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 나르시시즘이기 때문이죠.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인생은 위대할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이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절망을 알아야 인간다움을 압니다. 절망은 진리의 근본입니다. 그다음에 신앙을 갖든, 종교를 갖든, 오늘날의 소중함이든, 내일의 소중함이든, 상관없습니다. 인간이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려면 반드시 절망을 겪어야 합니다. 과거는 없습니다. 과거에 얽매인 인간은 진보가 없습니다. 제 글을 몇 번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아실 것입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이지요.


그런데 신은 딱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주시더군요. 그게 절망입니다. 그래야 인간은 알거든요. 본인의 인생의 가치를 그제야 알게 된다는 의미이지요. 그 수많은 종교의 진리 중에 "깨있어라."라는 의미는 이 의미입니다. 사람은 절대적으로 이기적이기에 절망이 없으면 알지 못합니다.




저는 제 인생이 그래서 꼬인 줄 알았습니다. 제 인생이 험난한 이유는 어떤 큰 의미가 있는 줄 알고, 감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의붓오빠가 죽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가 믿는 신에게 며칠 전까지 원망했습니다. 왜 제 의붓오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냐고요. 딱 세 시간만 기다려달라고 기도했는데, 왜 아버지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냐고요.


알고 보니 제 험난한 여정들은 다 제가 마땅히 지고 가야 할 십자가였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신은 천사와 닮은 사람, 당신과 닮은 사람을 먼저 데려가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직 데려가시질 않은 걸 보니 좋은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그렇게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으니까요. 그저 순박하고 싶은 척하려고 솔직하게 사는 것뿐이니까요.




그 유명한 아포리즘을 서술한 쇼펜하우어는 말합니다. 절망을 맛봐야 사람이 사람다워진다고요. 동의합니다. 인간은 수없이 절망을 해봐야 현재와 미래를 살아갑니다. 이 근본적인 진리가 우울증의 원인이라면 의사들이 착각하는 거겠지요. 의사들 나름대로 각자의, 짊어질 만큼의, 십자가를 지고 있거든요. 저는 이걸 이제야 깨달았네요.


여러분들은 제발, 저보다 일찍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도 징징대지 마시고요. 그게 당신의 삶입니다. 당신의 삶이기에, 누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삶이라서 그 누구도 살아보질 않았거든요. 누구는 저처럼 인생이 파란만장하다고 자신을 비하하지요. 또 누구는 평탄하게 인생을 살았다고 절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은 개개인의 그릇만큼 주어집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마시고, 어제의 내 마음의 그릇과 비교하시기를.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인생은 얼마든지 불행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이 특별하다고 자위하지 마십시오. 그저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 우리네의 인생입니다. 흘러가는 물처럼, 강물처럼 살으라는 그 옛날 어르신들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저주가 아니라 정말 진리가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깨달아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절망을 해봐야 행복을 압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누군가는 절망을 통해서 성공하고, 돈을 벌고, 억대 부자가 됐다고 자랑합니다. 다 필요 없습니다. 인간은 절망을 알아야 행복을 알게 되는 아주 단순한 동물입니다. 그 옛날, 석기시대, 선사시대에 야생동물에게 죽어나가던 인간의 조상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의 인생이 불행해서, 운이 좋지 않아서 죽는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죄송하지만, 우리는 그저 우주의 먼지 한 톨뿐입니다. 한 톨도 안될 수도 있지요. 그냥 저기 멀리 보이는 공기의 한 조각, 생물체도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본인의 인생이 특별한데, 이런 시련을 왜 겪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설계돼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란 동물은 이기적이라, 늘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요. 그런 이유 따위 없습니다. 그냥 인간이기에 그런 운명을 타고났고,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갑자기 비판적인 말을 꺼내냐 하면, 여러분들은 너무 착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울증을 겪는 이유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이 늘 제게 강요를 했거든요. 본인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상황과 감정을요. 그렇다고 저를 이렇게 만든 부모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원망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저는 저이니까요. 저는 우울증을 겪을 수밖에 없는 좋은 머리를 타고나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요. 이게 제 자위라면 자위이겠지요.




사람들은 본인의 인생이 굉장히 특별하다고 믿습니다. 그건 본인의 인생이 주연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명확합니다. 본인의 인생이 관점에 따라 조연일 수도, 이름 없는 엑스트라일 수 도요. 수많은 부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 인생은 제가 주연이고, 제가 그래서 꿈을 이뤘습니다." 아니요. 그 관점에 따라 다르다는 걸, 그 차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겁니다. 자신의 탄탄한 성장환경과 돈이 없었다면,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확신을 얻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이제 성공한 사람들의 말을 기울여야 할 것이 아니라, 각자 본인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본인의 답답한 상황에 대한 답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제 일생동안 이 진리를 갖고, 제 손과 입으로 천주 성부의 말씀대로 선한 영향력을 퍼트릴 것입니다. 저는 이게 선한 영향력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선함은 늘 착한 소리를 하지 않고, 옳은 소리를 하지요.




제 인생이 파란만장하다고, 기구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가 겪은 편견들은 당신들이 욕할 게 아니라, 한 번 되돌아봐야 할 성찰의 시간입니다. 네, 저는 저를 욕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싶습니다. 증명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저를 그렇게 욕하는 당신네들이 참 불쌍합니다. 인간답게 생각하지 못하는 당신들이 불쌍합니다.


저는 저를 욕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본인들이 했던 욕이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갈 것임을요. 저는 단단한 사람입니다. 저는 뿌리가 깊은 사람입니다. 논리가 맞지 않지요? 제 인생을 증명하려고 하는데, 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느냐고요. 하지만 이제 저는 저를 욕하는 나그네들에게 침을 뱉고 싶지도 않아 졌습니다.




저는 제 인생을 되돌아보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절망이야말로 인간을 사람답게 만든다고요. 저는 머리가 꽃밭인 사람들이 말하는 헛된 희망을 제 글을 읽는 독자분들에게 심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인생은 험난합니다. 절망의 연속이고요. 늘 내가 헤쳐나가야 할 저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험준하고 난폭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중심이란, 내 자아가 될 수도, 내 생각이 될 수도 있지요. 그중에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생각을 진화시켜 자아를 만들든, 자아를 만들기 전에 생각을 완성시키든 상관없습니다. 사람은 절망을 해봐야 비로소 인생을 알게 됩니다.



오늘도 저는 제 세례명을 지어준 예수님의 일화를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지요. "끝은 창대하리라."

제 인생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의 인생도 끝은 창대할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