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더베이킹랩 이성규
Mar 16. 2020
사표를 던졌다. 아내가 사준 오븐으로 사부작사부작 빵을 구운 지 일 년 하고 몇 달이 지난 후의 일이다. 조그만 동네 빵집을 내서 빵을 원 없이 구워보고 싶었다. 한번 짐을 꾸리면 한 달의 반 이상을 외국의 호텔방에서 지내야 하는 생활이 지겨웠는지도 모르겠다. 좁은 좌석에 구겨 앉아 있어야 하는 장거리 비행기 여행에도 넌덜머리가 나던 차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결정이었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이 짓 아니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욕망이 무엇으로도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빵집을 하자니 빵을 배워야 했다. 집에서 혼자 연습하는 빵은 판매하기엔 터무니없이 수준이 낮았다. 제품으로 팔 수 있는 빵 같은 빵을 굽는 법을 배워야 했다. 무엇보다 필요했던 건 빵집에 필요한 장비며 빵집 운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동네 빵집도, 자영업도 내겐 처음이었으니.
회사 업무 인수인계를 하며 이런저런 교육 프로그램을 알아보았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샌프란시스코 베이킹 인스티튜트(San Fransisco Baking Institute)의 사워도우 빵 베이킹 단기 코스였다. 일주일 단위로 진행되는 단기 코스 서너 개를 이어 들으면 한 달 만에 웬만한 사워도우 빵 굽는 법은 물론이거니와 제빵 설비와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배울 수 있겠다 싶었다. 과정이 끝나면 꿈에 그리던 타르틴 베이커리에서 수습의 기회도 한번 노려보고, 화덕에서 사워도우 빵을 굽는다는 데이브 밀러를 찾아가 옆에서 빵도 같이 구워보고, 인상 좋아 보이는 조시 베이커도 만나 그의 빵 이야기도 들어 보자. 이런 기분 좋은 상상에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나 자신을 한번 진정시키고 아내에게 진지하게 내 계획을 털어놓았다.
"여보, 우리 샌프란시스코 함 갈까?"
"왠 샌프란시스코?"
"아 거기에 샌프란시스코 베이킹 인스티튜트라는 기관이 있는데 단기 베이킹 코스가 좋은 게 있네. 거기서 단기 코스 두세 개 들으면 빵집 여는데 큰 도움이 될 거 같은데. 혹시 알아. 그거 마치고 그 동네에서 기가 막힌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온 아내의 일성.
"가긴 어딜 가! 있어봐 내가 국내에 있는 거 알아보고 있으니까."
그 말 한마디에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 둥둥 떠 다니던 나는 땅으로 떨어졌다. 철퍼덕.
인터넷을 열심히 뒤진 아내는 양평에 있는 곽지원빵공방을 추천했고 나는 서래마을의 아티장베이커스를 선택했다. 이왕 배우는 거 짧은 시간에 해 보자는 생각으로 두 과정을 모두 신청했고, 한주에 3일 빵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 사이 다니던 회사 업무 인수인계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님은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인수인계 한 달로는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 같다. 이 이사, 그동안 해온 일이 얼마인데. 아직 직원도 더 뽑아야 하고. 몇 달만 더 일해줘야겠는데. 어때?"
"아 그건 좀 곤란한데요. 제가 빵 수업을 등록해 놓아서요."
"그래도 어떻게 시간을 조율해 보자고."
"월화목은 빵 수업을 가야 하니 수업이 없는 수금 이틀 출근하면 어떨까요?"
"그럼 그렇게라도 해야지 뭐. 그럼 인사팀에 말해 놓을게"
그렇게 3일 빵을 배우고 이틀 출근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빵을 배우는 건 쉽지 않았다. 손으로 뭔가를 본격적으로 만들어보는 건 처음이라 손이 맘처럼 움직여 주질 않았다. 빵 수업에서 난 지진아였고, 내가 하는 별난 행동에 수업시간은 웃음바다가 되곤 했다. 오전 10에 시작해 오후 4, 5시까지 이어지는 수업에 허리도 아프고 등도 아팠다. 잠깐의 점심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일 새가 없으니 허리가 아픈 건 당연한 일. 한 달쯤 시간이 지나자 몸은 적응을 시작했고 통증도 어느 정도 사라졌다. 인간의 적응력은 놀랍다.
수업을 통해 부드러운 빵에서부터 딱딱한 빵까지 다양한 빵을 배웠다. 빵의 배합과 공정을 익힐 수 있었다. 제빵에 사용되는 다양한 재료들을 접할 수 있었다. 화학첨가제나 인공재료도 포함해서. 물론 화학첨가물이 들어가지 않는 빵을 굽겠지만 이들 재료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다.
수강 기간 동안 눈여겨본 것은 제빵에 필요한 설비와 제빵 작업의 동선을 고려한 배치였다. 10평 남짓의 동네빵집을 구상하고 있었기에 효율적인 공간 활용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빵 스케줄을 이해하는데도 주의를 기울였다.
수업 중에 많은 양의 빵을 구웠다. 구워낸 빵의 수와 함께 빵 만들기 기술도 늘었고 내가 구워낸 빵도 달라졌다. 양의 축적인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법. 큰 봉지에 가득 빵을 들고 빵 공방을 나설 때면 뭔가 해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했다. 구운 빵은 이웃과 회사 동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파트 정원을 찾아오는 비둘기, 참새 등 동네 새들도 내 빵을 찾는 고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빵을 가장 맛나게 먹어준 건 가족도 이웃도 회사 동료도 아닌 동네 새들이었던 것 같다. 맛없는 빵, 맛있다며 나를 격려해주신 이웃과 회사 동료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