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학원에서 친구를 사귄 적이 있다. 다른 학교에 다니던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다 같은 여대에 진학 했다. 영문과에 다니던 그녀와 경영학과에 다니던 나는 각각 같은 과 친구를 데려와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졸업 후 각자 취업을 했고 그녀는 어학원에 근무했다. 한 번은 모르는 남자에게 편지를 받았다. 친구가 다니는 회사의 영어테이프로 공부하던 그 사람은 내게 효과가 있었냐는 질문을 했다. 알고 보니 친구는 회사 잡지의 뒷면에 영어테이프 사용자의 후기를 올렸는데 내 이름과 주소를 적었다고 했다. 또 다시 편지가 왔고 영어 학습에 대해 이야기 하자며 시내의 한 서점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호기심에 약속장소에 나갔고 일러 준대로 복장을 갖춰 입은 사람을 보자 아는 척을 할지 말지 망설였다. 한번쯤 이야기해보기로 했고 그 사람은 뉴질랜드 이민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그 이후 만남 제의에 응하지는 않았다. 어학원에 근무하던 친구는 일찍 결혼을 했다. 그녀는 취업이민을 가게 된 남편 따라 뉴질랜드로 떠났다. 그 이후 친구와 편지를 몇 차례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겼다. 가끔 뉴질랜드에 대해 상상을 했다. 아주 멀고도 여유로운 곳일 거라는 막연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를 보면 뉴질랜드는 별세계처럼 여겨졌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나 ‘한국이 싫어서’에도 뉴질랜드가 나온다. 뉴질랜드는 견디기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떠올리는 나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인천공항에서 11시간 20분 걸려 뉴질랜드 북 섬의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남편과 함께 패키지 여행을 떠났다. 2월 말, 뉴질랜드는 여름의 끝이자 가을의 시작 시점이었다. 이동하는 버스 창밖으로 초원이 펼쳐졌다. 이런 풍경이 뉴질랜드구나. 막연했던 상상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목장. 나무들, 쨍한 햇빛. 가장 인상적인 것은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이었다. 푸른 하늘에 낮게 깔린 긴 구름에 자꾸 시선이 갔다. 그런 구름 들은 ‘아오테아로아’라고 불리 우며 ‘길고 하얀 구름'의 의미가 있다. 오래 전에 마오리족의 족장이 항해를 하다 섬을 발견했다. 같은 배에 타고 있던 그의 아내는 멀리서 만년설을 보고 ’저기는 섬이 아니라 길고 흰 구름이에요‘라고 말하며 상륙을 말렸다. 하지만 족장은 그곳으로 가보았고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그 아내의 말에서 ’아오테아로아‘가 유래했다고 한다. Aotearoa, 알지 못했던 용어지만 자꾸 되뇌어 보게 되었다. 낮게 깔린 길고 하얀 구름들은 뉴질랜드 지역에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거였다. 버스를 타고 계속 달려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풀밭과 양과 하늘과 구름이다. 뉴질랜드 면적은 남한의 2.7배인데 인구는 500만 정도라니 어디를 가나 여유로웠다.
오클랜드에서 차로 2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와이토모로 이동했다. 석회 종유동굴인 와이토모 동굴 안은 강물이 흘렀다. 일행들과 함께 보트를 타고 이동하며 올려다 본 동굴 천정은 반딧불 들로 은하수가 있는 하늘처럼 빛났다.
로토루아에 있는 폴리네시안 스파는 세계 5대 온천 중 하나로 유황온천이다. 수질이 좋은 온천에서 피로를 풀며 로토루아 호수를 바라봐도 좋았겠지만 나는 물에 못 들어갔다. 여행하기 며칠 전 동네 뒷산에서 맨발걷기를 하다 발가락에 상처가 생겨 치료 중인 상태였다. 휴대용 스케치 도구를 꺼내 주어진 시간에 풍경을 그려보기로 했다. 온천 가까이에는 붉은 흙과 흰 석회석 알갱이들이 어우러진 평지가 펼쳐졌다. 그 너머로 셀루리안 블루 연한 푸른색의 호수가 이어졌고 멀리 깊고 푸른 산들이 자리를 잡았다. 산 위로는 코발트 빛 넓은 하늘에 가볍고 폭신해 보이는 구름들이 몽글 몽글 줄지어 떠있었다. 눈앞에 존재하는 선명하고 청량한 색채의 조합에 사로잡혀 종이에 그림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로토루아에서는 헤리티지농장에서 목장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키아 오라” 안녕하세요? 가이드가 가르쳐 준 대로 일행들은 트랙터를 타고 온 농장 주인에게 인사를 했다. 주인은 웃으며 먹이 주는 시범을 보였다. 우리 부부도 따라서 해봤는데 손바닥에 사료를 올려놓으면 양들이 와서 먹었다. 농장에는 양과 소, 알파카 스코틀랜드에서 온 소인 하일랜드 소등이 있었다. 버스에서 지나치면서 봤던 목장과 동물 들을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좋은 기회였다. 로토루아에서는 7개의 간헐천이 있고 마오리 문화를 볼 수 있는 와카레와레와, 뉴질랜드 임업시험장이 있는 레드우드 삼림욕장, 영국 식민지시대 관청으로 사용되었던 거버먼트 가든을 방문했다.
바람과 요트의 도시로 불리우는 오클랜드에서는 마이클 세비지 공원과 한국전쟁참전용사 기념비를 들렀다.
오클랜드에서 1시간 30분 정도 비행기를 타고 남 섬의 퀸스타운으로 이동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분위기가 북 섬과 달랐다. 묵직하고 장엄했다. 와카티푸 호수를 끼고 있는 퀸스타운은 번화하고 관광객이 많았다. 와카티푸 호수는 ’거인이 만든 구멍‘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호수 주변의 나무들은 가을빛을 띄기 시작했다. 호숫가에는 요트도 많이 정박되었고 잔디밭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앉아 쉬고 있었다. 사람들 주변에는 갈매기 들이 자연스럽게 걸어 다녔다. 거리 공연도 열렸고 한 화가는 노을 지는 호수 그림을 현장에서 시연했다. 가로등 노란 불빛 아래 나지막한 둑에는 사람들이 걸터앉아 푸른 밤으로 접어드는 호수와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걷다가 호수가 보이는 식당에서 맥주를 마셨다. 진정한 휴양지에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퀸스타운에서 밀포드사운드로 가는 동안은 대자연의 풍경이 펼쳐졌고 웅장한 산이 많았다. 주변 설산에서 녹아내린 맑은 물이 모인 ’거울호수’는 이름에 걸맞게 맑았다. 하늘과 산과 나무의 반영이 수면에 또 다른 풍경을 만들었다.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던 청정이라는 단어는 밀포드사운드 크루즈를 탔을 때 피부로 느껴졌다. 탑승하고 실내에 있다가 배의 위로 올라갔다. 날씨가 흐렸다. 물길 따라 양편으로 능선이 가파른 산들이 이어졌다. 자욱한 안개를 품고 회색 빛 구름을 머리에 인 험준한 바위 산의 사면을 따라 폭포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스탈링 폭포 앞에서는 빗물인지 폭포물인지 얼굴에 튀는 물방울들을 고스란히 맞았다. 빙하작용으로 인해 피요르드 지형이 형성되어 바다까지 이어지는 협곡을 따라 배를 타고 가며 원시 그대로의 청정한 자연을 마주했다.
마운트 쿡 을 향해 가는 길에서 만난 푸카키 호수와 ‘착한 양치기 교회’가 있는 테카포 호수는 에머랄드 빛이었다. 빙하가 녹아 형성된 호수 들은 맑았다. 푸카키 호수 너머로 만년설이 쌓인 마운트 쿡이 멀리 보였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나 타스만 빙하뷰 트래킹을 할 때나 설산 마운트 쿡에 계속 시선이 갔다. 마운트 쿡 봉우리는 날카롭게 각을 세우며 시리게 푸르고 하얀 색으로 빛났다. 정상은 눈처럼 하얀 구름이 이불처럼 얹혀져 있었다. 원주민 마오리족은 마운트 쿡을 ‘구름을 꿰뚫는 자’라는 의미의 ‘아오라기’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 표현이 실감났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캐슬힐로 가는 도중 창밖으로 목장이 펼쳐졌다. 목초지에 물을 주는 기계는 바퀴가 달려 이동이 가능했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뉴질랜드의 인구 대 양의 비율이 1대 5 정도이고 방목하는 소 한 마리당 1224평이 필요하다고 한다. 방목하는 가축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기계화가 필수 일 것이다. 방목하는 가축들에게는 인공사료를 안 먹이고 치커리, 유채 등 먹을 만한 풀을 먹인다. 가축 들이 햇빛을 받으며 평화롭게 지내는 풍경도 알고 보면 다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적인 지형을 목장에 맞게 만들고 산을 불태워 초지로 만들었다한다. 소와 양들은 거의 다 암컷들이다. 수컷은 태어나면 일부만 남기고 없앤다. 양은 4년 정도 되면 도축된다. 목장 운영자들은 투자를 하고 유지하고 생산한다.
누렇게 색이 바래가는 너른 초지를 걸어 크고 작은 흑색 바위들이 흩어져 자리잡은 구릉 지대로 올라갔다. 오랜 세월 풍화에 의해 모서리가 둥글둥글 다양한 형태로 마모된 돌들은 특별한 세계로 안내했다. 캐슬힐은 비현실적인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어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연대기의 촬영지가 되었을 것이다. 3500만 년 전에는 상어도 살았던 바다 속이었다고 한다. 해발 700미터의 언덕에 저마다 다른 크기의 석회암바위가 웅장한 대자연이 펼쳐졌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무지개를 봤다. 커다란 반원 형태의 7가지 색깔 선명한 쌍무지개였다. 무지개를 언제 봤는지 아득할 정도여서 반가웠다. 일행들은 모두 동심으로 돌아간 듯 환호를 했다.
크라이스트처치에는 공원이 많았다. 인구 40만명인 도시에 1400여개의 공원이 있다고 한다. 시내중심으로 흐르는 에이번 강을 바라보고 헤글리공원에 들렀다. 1850년에 지어진 네오 고딕양식의 캔터배리 대학교는 고풍스러웠다.
크라이스트처치공항에서 뉴질랜드 여행을 마무리했다. 공항의 기념품 매장에서 키위 새 인형을 봤다. 키위 새는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국조(國鳥)다. 부리가 길고 과일 키위와 비슷한 느낌의 색채를 지녔다. 여행 도중에는 거울호수를 보고 마운트 쿡으로 갈 때 도로변에서 본 적이 있다. 키위 새들은 주차 해놓은 차 위에도 올라가 있고 사람들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는 듯 주변에서 걸어 다니기도 했다. 키위 인형도 눈길을 끌었지만 ‘long white kitchen’이라는 음식점 상호와 단순화된 하얀 구름 마크를 보니 반가웠다. 뉴질랜드 여행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까지 아오테아로아(Aotearoa), 낮게 깔린 길고 흰 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