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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화 Oct 07. 2024

운현궁의 가을

도심 속 여백이 있는 공간

운현궁의 가을  

                                                

                                         

  중학교 때 서울의 외곽지역에 산을 끼고 있는 지역에 살았다. 동네에는 담장이 아주 길고 높은 집이 있었다. 그 근처는 인적도 별로 없고 가까이 가기가 어려운 분위기였다. 권세 있는 사람의 별장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궁금하면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들이 있다. 궁궐이나 유명인이 거주한 곳이 시간이 지나면서 공개되기도 한다. 구한 말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도 이제는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11월 중순, 안국역 4번 출구 도로변에는 가로수 잎들이 보도에 떨어져 있었다. 낙엽을 보며 걷다가 자연스럽게 운현궁 대문으로 이끌리듯 들어갔다. 시내 한 복판에서 여백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조금은 흐린 날, 늦가을 정취를 품은 너른 마당을 보며 마음이 차분해졌다. 가을 단풍과 어우러진 담백한 한옥은 운치가 있었다. 세 채의 한옥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들어앉았다. 오른편은 사랑채인 노안당, 가운데는 안채인 노락당, 왼편은 이로당이다. 디귿자 형태의 노락당은 안채답게 더욱 돋보인다. 가지런한 회색빛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한옥 건물의 나무 소재 색깔은 미묘하게 다양했다. 짙고 옅은 갈색과 붉은 빛의 기둥 사이로 하얀 창호지가 발라진 문 들이 어우러져 짜임새가 있었다. 뒤편에 서있는 석조건물인 양관과 더불어 신구의 조화를 이룬 특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운현궁(雲峴宮)은 고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운현은 오늘날 기상청에 해당하는 서운관(書雲館)이 있는 앞의 고개라는 뜻이다. 이하응은 둘째아들이 왕이 되자 대원군이 되어 국정운영에 관여했다.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 경복궁 증건, 쇄국 정책 등을 실행했다. 그의 세력은 1873년 최익현의 상소로 10년 만에 사그라 들었다. 대원군은 며느리인 민비와의 갈등과 더불어  임오군란, 갑오개혁 등을 겪으며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운현궁은 대원군이 칩거하며 그림을 그렸던 예술적 공간이기도 했다. 대원군은 어린 시절에 추사 김정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가 그린 란은 호인 석파를 붙여 석파란(石坡蘭)이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따라 구름의 형태가 바뀌듯 모든 것이 달라진다. 집 이름의 구름 운()자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흥선 대원군의 주된 거처였던 노안당, 고종과 명성왕후가 가례를 올렸던 노락당, 가례 이후 그들이 운현궁에 머물 때 노락당을 거처로 사용하자 새로운 안채로 세워진 이로당. 운현궁의 건물들은 여러 이야기 들을 지니고 있다. 역사는 사실과 상상이 보태져서 예술 작품이 되기도 한다. 김동인은 1933년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역사 소설 운현궁의 봄을 발표했다. 운현궁에 거처했던 대원군의 득세를 봄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한옥 건물과 서양식 건물 사이의 나무들로 시선이 갔다. 푸르른 소나무도 있지만 활엽수들은 주황빛과 갈색을 품고 있다. 가을의 운현궁. 생각의 여지를 주는 도심 속의 공간이다.   


         

운현궁과 안국역 4번출구 사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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