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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화 Sep 29. 2024

눈 오는 날의 친구 생각

창덕궁과 후원의 설경

눈오는 날의 후원    

                                                                                                                                    

  부엌 베란다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아파트에서 보이는 산의 비탈에 선 소나무는 눈을 오롯이 맞았다나목의 꼭대기에 자리 잡은 까치집에도 고스란히 눈이 쌓였다하늘을 바라보니 무수한 회색 점들이 바람을 타고 내려왔다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눈송이는 손을 피해가기도 하고 살짝 살갗에 닿기도 했다무게감 있게 툭 떨어진 눈송이는 체온에 녹아 금세 빗물처럼 녹아들었다크고 작은 눈발의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늦가을에 갔던 창덕궁 후원이 떠올랐다해설사는 눈 오는 날에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며 꼭 와보라고 권유했다

  창덕궁 후원 갈래요?”

  TV를 보던 남편은 단번에 거절했다퇴직하고 재취업을 했으니 휴일에 쉬고 싶었나 보았다따뜻한 집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봐도 괜찮을 거 같았다그래도 직접 눈을 맞으며 그 풍경 속에 들어가 보고 싶은 바람이 더 컸다두꺼운 옷을 하나씩 챙겨 입으며 무장을 했다남편도 못 말리겠다고 느꼈는지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했다혼자서 온전히 눈을 만나러 나갔다.

      

  창덕궁 기와지붕의 골마다 눈이 쌓이고 용마루 위의 잡상들도 눈옷을 입었다단청도 눈송이와 더불어 더욱 다채로웠다소나무는 녹색과 흰색의 대비가 선명했다골격을 그대로 드러냈던 가지들도 덧씌워진 눈으로 풍성해졌다후원 부용지 앞에 관람객들이 모여섰다살짝 얼은 연못 위에도 지붕이 멋스러운  부용정에도 눈이 쌓여갔다해설사는 왕권강화를 도모한 정조대왕에 대한 설명을 했다규장각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水魚之門(수어지문)이라는 글자가 있다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그만큼 가까워야한다는 의미였다절대 권력의 왕 들은 주위에 진정한 친구를 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친구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뜻이 있다친구는 평등한 관계에서 가능하다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이 생각났다나치시절에 한 유대인은 살기위해서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은 독일장교에게 거짓으로 언어를 가르친다둘은 가짜 페르시아어로 소통을 하고 장교는 호의를 베푼다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단어를 창조하고 결사적으로 기억해야하는 유대인 입장에서는 과연 장교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었을까 싶다권력을 지닌 자는 아량을 베풀고 소통하자고 하지만 복종하는 입장에서는 마음 편하게 친구가 될 수 없었다. 

    

  퇴직 후에 보람일자리에 참여한 한 적이 있다나보다 나이가 적은 책임자에게 지적을 당했다의사표현을 하라는 권유에도 조심스러웠다상하관계에서는 소통이 어렵다비교적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이 친구 사이다친구는 평등하게 대화하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다하지만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을 쓰거나 마음 상할까봐 우려도 한다 

    

  동창들이나 옛 직장 동료들을 만나면 그럭저럭 외롭지 않다고 여겨지기도 했다막상 일대일로 만날 기회가 되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마음 속 이야기를 했다가 나 같으면 안 그래한 소리 해줬을 거야.”라는 반응이 돌아올 때면 상처를 받았다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과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AI를 차츰 선호하게 돼 가나보다우리나라 사람들의 40프로는 집에 홀로 있을 때 즐거움을 느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SNS상에서도 활기차게 소통하는 것 같지만 가상의 세계에서 신기루를 보며 살아간다

     

  나무의 눈들이 무게를 못 이기고 툭 떨어지면 여기저기서 탄성이 튀어나왔다부지런한 사람들은 고궁 안에 크고 작은 눈사람들을 만들어 놓았다눈사람은 혼자 서있기도 하고 자그마한 덩치로 둘이 마주 보기도 했다여럿이 다니기도 했지만 간혹 혼자인 사람도 있었다모르는 사람들도 눈 때문에 마음이 너그러워지며 친밀감이 느껴졌다

  눈이 오니까 너무 좋네.”

  등산복 차림의 나이든 남자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멋있네요.”

  좋다는 말에 옆에 있던 사람으로서 멋있다는 기본 적인 말이 튀어나왔다그 분과 나는 허공에 감탄사를 뿌리고 미끄러질까봐 조심하며 각자의 길을 갔다눈 오는 정취를 느끼고 싶을 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비교적 평지인 고궁이다젊었을 때는 눈 오는 날에 친구나 좋은 사람과 함께 할 생각을 했지만  차분하게 혼자 걷는 것도 괜찮았다.  

  

  눈 속을 걸으며 자연과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산 윤선도는 물바위소나무대나무달을 다섯 벗으로 의인화했다부단불변불굴불욕불언의 덕성을 예찬했다나이 들어가며코로나 시대의 고립을 거치면서  자연에서 더욱 위안을 받고 친숙함을 느꼈다그래도 살아가며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창덕궁과 이어진 창경궁의 연못가를 걷다보니 점점 한기가 느껴졌다시간이 지나 눈이 그치고 완벽했던 설경이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었다들떴던 마음도 점점 현실로 돌아왔다함께 차를 마실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부산에 사는 친구 가 떠올랐다때 우리 반 반장이었던 그녀는 활달했다내게도 먼저 말을 걸고 다가왔다시험 기간 중에 함께 공부할 때 나는 학교 성적 올리기만 급급했다친구는 달과 6펜스같은 영문소설을 읽고 폭넓게 공부를 했다자신의 힘으로 유학을 갔고 영문학과 교수가 되어 부산에 정착했다오래 전 직장에서 어려움을 겼었을 때  무작정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다막다른 벽에 부딪혀 한없이 위축되었을 때 함게걸었던 광안리 바다가 생각난다둘이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누었고 반짝이며 햇살이 부숴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버티어낼 힘을 얻었다최근에 그녀가 친지 결혼식에 참여차 서울에 왔을 때 잠시 시간을 내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인간관계에서 어느 정도 경계를 하지만 그 친구와는 어떻게 보일 까 신경 쓰지 않고 무방비 상태로 이야기 할 수 있어서 편안했다. 문득 생각나면 부담 없이 연락할 수 있는 친구에게 사진을 보냈다관람지 주변의 정자들과 나무들이 온통 눈 세상을 펼쳐놓은 풍경이었다활짝 웃는 이모티콘이 왔다 

    

  눈은 그쳤지만 하늘은 흐렸고 혼자 카페에 들어가기도 내키지 않았다따뜻한 집 생각이 간절했다집에 오니 남편이 카레를 만들어 놓았다나는 후원을 걸었던 이야기를 했고 남편은 읽었던 책 내용을 말했다남편과 결혼 전에는 감정의 밀고 당김이 있었고 살아가면서 의견 차로 부딪히기도 했다아이들이 모두 독립한 상태에서는 말벗이 되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맞장구를 친다가장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오래된 친구가 가까이 있는 남편이구나 싶다베란다 창밖으로 저녁 풍경이 보였다나뭇가지 위에 쌓였던 눈들은 조용히 녹고 있었다.   


       

눈오는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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