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말랑말랑한 시집이 필요해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슬픔이 기쁨에게>

by 치유

빽빽한 텍스트들이 아니라 여백 속에 감추어진 생각에 취하고 싶은 날, 말랑말랑한 시집이 읽고 싶을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내가 펼쳐보는 시집이 두 개 있다. 나태주 시인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와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다.




나태주 시인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그의 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풀꽃, 나태주 -


그렇다. 언젠가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다 보았던 그 시가 맞다. 그의 시 '풀꽃'은 25년간 광화문 교보생명 본사에 걸린 ‘광화문글판’ 가운데 ‘가장 마음을 울린 글귀’ 1위를 차지했다.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 가운데 인터넷이나 SNS에 자주 오르내리는 시들만 모아 엮은 책이다.


‘내가 너를', '그 말', '좋다', '사랑에 답함', '바람 부는 날', '그리움', '못난이 인형', '허방다리', '첫눈', '섬', '느낌', '한 사람 건너', '사는 법' 등 시인의 순수하고 주옥같은 시들을 수록하고 있다.


노시인의 세련된 감각의 시


사실, 처음 그의 시를 보았을 때는 많아야 30대 중후반 정도의 감수성 예민한 남자 시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흔이 넘은 시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조금 놀라웠다.


노시인이 어떻게 이렇게 세련된 감각의 시를 쓸 수 있을까? 그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그는 이러한 시를 쓸 수 있는 이유를 '늙지 않는 마음 덕분'이라고 표현했다. 그야말로 시인다운 시적인 표현이다.


1945년 생인 나태주 시인은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현재까지 40여 권의 창작시집을 포함해 100여 권의 책을 펴냈고, 43년간 교직 생활을 하다 퇴임 후 공주에서 공주 풀꽃 문학관을 설립·운영하고 있다. 그의 시를 읽어보면 '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나처럼).




나태주 시인의 시가 사랑의 달콤한 맛에 취한 사람의 시 같다면, 정호승 시인의 시는 인생의 쓴맛에 취한 사람의 시 같다.


시만 보면 정호승 시인이 훨씬 나이가 많을 것 같지만, 오히려 5살 정도 어리다. 1950년 생인 정호승 시인은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1989년 소월시문학상, 2000년 정지용 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수선화에게’ 등을 발간하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수선화에 대한 전혀 다른 시


정호승 시인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그의 시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수선화에게'라는 시는 외로움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삶의 본질임을 담담히 얘기하면서도, 외로움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을 담백하게 위로한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의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수선화에게, 정호승 -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 내려온다니, '세상 모든 만물이 외로움을 안고 산다. 그러니 너도 너무 외로워 말라.'라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같은 수선화라는 꽃을 두고 나태주 시인은 어떤 시를 썼을까?


언 땅의 꽃밭을 파다가 문득
수선화 뿌리를 보고 놀란다.
어찌 수선화, 너희에게는 언 땅 속이
고대광실 등 뜨신 안방이었더라 말이냐!
하얗게 살아 서릿발이 엉켜 있는 실뿌리며
붓끝으로 뾰족이 내민 예쁜 촉.
봄을 우리가 만드는 줄 알았더니
역시 우리의 봄은 너희가 만드는 봄이었구나.
우리의 봄은 너희에게서 빌려온 봄이었구나.

- 수선화, 나태주 -


한 시인은 수선화에서 외로움을 보고, 다른 시인은 같은 꽃에서 봄을 본다. 나는 두 시인의 시선이 모두 좋다. 인생은 때로는 한없이 아름다운 시선도, 때로는 담담한 시선도 필요하니까.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는 친한 언니 덕분에 알게 된 시집이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크게 공감하지 못했는데 곱씹을수록 많은 생각이 드는 시들이 많다.


그의 시집을 읽을 때마다 이 시들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인생의 내공을 더 쌓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0살쯤 더 나이를 먹고 나서, 백번쯤 이 시집을 읽으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될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읽힌다는 점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 아닐까? 여백 속에 함축되고 감추어진 의미들을 나의 머릿속 문장들로 채워본다. 그렇게 몇 줄의 시는 몇 장의 보이지 않는 문장으로 늘어난다.


https://youtu.be/_QPAx99E_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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