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하는 움직임-예술과 요가의 만남

함께 나누는 감각

by 김덕분

형태를 깎으며 배운 것들 – 예술에서의 ‘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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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나는 흙과 돌 사이에서 하루를 보냈다.

흙을 떼었다가 다시 붙이고, 또 떼고…그 반복 속에서 형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채움의 사이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흙은 정말 특별한 재료였다. 손끝에 닿는 온기, 수분을 머금은 부드러움, 만지면 그대로 따라오는 솔직한 결… 흙은 숨을 쉬듯 반응했다. 조금만 방치해도 마르고 갈라져 떨어져 나갔고, 수분이 과하거나 모자라면 이전에 붙였던 흙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흙 작업은 늘 ‘돌봄’이 필요했다. 매일 적당한 수분을 주고, 손길을 얹어 결을 맞춰주고, 흙이 나와 함께 살아 움직이도록 보살피는 시간…

나는 그때 알지 못했지만, 그 과정은 요가의 아사나를 다듬는 일과 너무 닮아 있었다.

몸도 흙처럼 매일 돌봐야 하고, 수분처럼 ‘호흡’을 적당히 주어야 하고, 내면의 온도가 흐트러지면 자세의 결도 금세 갈라졌다.


돌조각은 또 다른 세계였다. 겹겹이 쌓인 단단함 속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어 진짜 형태를 드러내는 작업… 깎고 또 깎아내다 보면 어느 날은 형태가 잡히다가, 또 어떤 날은 너무 많이 덜어내 내가 찾던 형상이 사라지고 작은 파편만 남아 허무했던 날도 있었다.


특히 두상을 흙으로 만들 때는, 사진을 보고 그대로 따라 만든다고 해도 결과는 늘 달랐다.

그날의 내 감정, 숨의 리듬, 마음의 결이 얼굴의 근육과 표정으로 그대로 번져 나왔다.

‘보고 만드는 것’보다 ‘내가 어떤 상태로 바라보는가’가 더 강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지금 떠올리면 그건 일종의 흙(점토) 미술치료였다. 손은 형태를 만들고 있었지만, 형태는 오히려 내 감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요가도 그렇다. 자세를 만들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자세가 나를 드러낸다. 숨을 들이마시면 채워지고, 내쉬면 비워지고, 그 흐름 속에서 내 마음의 모양이 서서히 떠오른다.

그때의 조각처럼 요가도 ‘채움’이 아니라 불필요한 힘, 감정, 긴장을 덜어내 남겨둘 것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예술이 돌을 깎아 본질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요가는 몸과 마음을 다듬어 본래의 나를 드러내는 예술이다.



공간을 다루며 배운 것들 – ‘채움과 비움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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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여러 유형의 공간을 다뤘다. 랜드스케이프, 상업 공간, 전시 공간, 야외 축제의 현장까지… 공간마다 언어는 달랐지만, 결국 하나의 공통된 감각이 있었다.


“공간은 채움보다 비움에서 살아난다.”


처음에는 더 많은 조명, 더 많은 오브젝트, 더 많은 장식이 공간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점차 알게 되었다. 어떤 공간이 ‘좋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무언가를 잔뜩 넣었을 때 보다 사람이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남겼을 때라는 사실을.


여백은 텅 빈 곳이 아니다. 여백은 사람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자리, 그 자리에 들어선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펼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내적 공간이었다.

동선이 흐르는 길, 시선이 머무는 지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 음악과 소음 사이에 놓인 조용한 구간…그 모든 것이 ‘여백’이라는 이름의 감각이었다.


요가 안내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여전히 공간을 다루는 일과 함께 한다.. 그리고 요가를 하며 더 분명히 느낀다. 공간을 다루는 일과 몸을 다루는 일은 같다.

요가에서 말하는 프라나의 흐름처럼, 공간에도 보이지 않는 숨길이 있었다. 동선이 막히면 호흡이 막히듯, 오브제가 과하게 쌓이면 마음도 답답해졌다.

반대로, 불필요한 것들을 치워내면 마치 폐의 깊은 곳에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듯 공간 전체가 밝아지고 사람들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공간의 비움은 곧 프라나의 길을 열어주는 일”


지금 돌아보면, 공간을 다루는 모든 경험은 요가가 말하는 “본질을 위한 비움”을 몸으로 먼저 배우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여백을 남기면 형태가 드러나고, 침묵을 남기면 소리가 살아나듯, 비워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요가에서 다시 만난 예술 – 움직임을 조각하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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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오래전 조각하던 나로 돌아가곤 했다. 조소를 하던 시절, 나는 군더더기 없는 선과 형태를 만들기 위해 흙을 떼고 붙이고, 돌의 과한 층을 조금씩 덜어냈다. “더 섬세하게, 더 정확하게.” 손끝은 늘 형태의 완성도를 좇았다.

그래서 요가를 할 때도 어딘가 익숙하게 그 습관이 올라왔다. 아사나의 선을 아름답게 만들고, 몸의 각을 정교하게 맞추려는 마음… 마치 움직임을 조각하듯 ‘모양’을 다듬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수련의 시간이 쌓이면서, 요가는 “보이는 선”보다 보이지 않는 흐름이 더 먼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힘을 덜어내고, 내 호흡이 지나가는 자리의 감각을 듣고, 의식이 움직임의 안쪽에서 자연스럽게 흘러야 비로소 바깥의 선도 정리된다는 것을…


조각에서 형태는 겉을 깎아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재료를 대하느냐에 따라 손끝의 결이 달라졌던 것처럼 요가의 선도 겉모습을 밀어붙일수록 무너지지만, 보이지 않는 의식의 흐름이 고요해질 때 비로소 ‘나다운 자세’가 드러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예전에 움직임을 조각한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나의 움직임에 조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완벽하려는 마음, 조급함, 시선의 비교는 몸의 결을 흐리고, 호흡의 리듬을 가볍게 흔들었다.


요가는 그것을 조용히 일깨워주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아사나를 만들지 않는다. 그저 이미 내 안에 있는 자연스러운 선이 숨과 함께 드러나도록 아나 갈 뿐이다.



예술과 요가는 왜 ‘연결하는 움직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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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깎는 일, 흙을 뗐다 붙이니는 일, 몸의 감각을 깨우는 일, 호흡을 다듬는 일…


이 모든 과정은 서로 닮아 있었다. 각각 다른 언어를 쓰지만 모두 본질을 만나기 위한 비움의 예술이었다. 예술은 형태를 깎으며 나와 세계를 연결했고, 요가는 호흡을 중심으로 몸과 마음을 연결했다.


이 모든 과정이 덕분에요가가 말하는 연결하는 움직임이다. 예술은 나를 세상에 열어주고, 요가는 나를 나에게 열어준다. 둘은 서로 다른 길이지만 한 마음의 중심에서 마주한다.

<MOVEMENT-PISCES>


덕분에요가의 관점: 예술과 요가의 흐름은 ‘본질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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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요가는 예술과 요가를 분리된 두 언어로 보지 않는다.

둘은 모두 “본질을 알아 가는 흐름”이며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어 진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조각에서의 비움, 공간에서의 여백, 요가에서의 호흡, 이 모든 감각의 결이 모이면 나와 세상의 관계가 깊어진다. 그래서 나는 예술을 하듯 요가를 하고, 요가를 하듯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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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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