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섭외 및 구성 -> 촬영 -> 편집(가편집, 종합편집) -> 후반 작업(음악, 효과)
모든 단계가 다 중요하겠지만 역시나 핵심은 '촬영과 편집'이라고 생각한다. 신입사원이나 PD를 지망하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서 편집이 촬영보다 중요하다고 까진 못하겠다. 그러나 촬영만큼 중요한 게 편집이다."라고. 또 "촬영하지 않은 걸 편집에서 만들어 낼 도리는 없다. 하지만 촬영한 내용을 전혀 다른 스토리로 재창조할 수 있는 게 편집이다."라고. 오죽하면 '악마의 편집'이란 말까지 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면 되게 그럴싸하고 우아할 것 같지만 편집 작업이라는 건 정말 뼈를 깎고 살을 에는 고통에 가깝다. 제작 전체 단계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외롭고 힘든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두컴컴한 골방에 홀로 갇혀 환하게 켜진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며 이렇게 붙여야 하나 저렇게 잘라야 하나를 고민하게 되는데.. 어쩐지 편집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잘 되지 않기 마련. 보통은 밤을 새우고 새벽에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 잠을 깨기 위해 자꾸 커피며 간식 같은 것을 먹다 보니 살이 찌고 몸이 상하는 경우도 다반사.
그렇게 며칠을 새고 난 후 방송이 잘 나가는 것을 보면 뿌듯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먹고 자고 싸고'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면 소위 말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이러고 살아야 하나?’.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 자막을 방송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어쩌면 그 자막을 쓰는 PD가 늘 하고 있는 생각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20년 넘는 PD 생활 동안 편집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아직도 괜히 힘들고 피곤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다. 지금도 수많은 후배들은 까만 밤 하얗게 새워가며 편집을 하고 있기도 할 테고. 그런데! 그런 편집을 얼마 전부터 우리 딸아이가 하겠다고 나서니 만감이 교차할 따름이다.
뭐? 우리 딸이 편집을 한다고?
사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루는 휴일을 맞아 그리고 내 생일을 맞아 아이와 함께 쿠키 만들기 놀이를 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빠에게 선물로 만들어주고 싶다나 뭐라나. 딸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하는 편인데 이런 경우 보통 몇 장의 사진으로 남기지만 어쩐지 그날은 아이가 동영상으로 찍어주면 안 되냐고 했다. 알겠다고 했더니 이어지는 좀 더 구체적인 주문. 마치 요리 유튜버처럼 자기가 요리 만드는 영상을 바로 앞에서 찍어 달라는 거다. 그래서 그렇게 세팅해주었더니 그때부터 “안녕하세요 오늘은 쿠키 만드는 법을 배워볼 거예요~” 이렇게 종알거리면서 마치 진짜 유튜버처럼 진행을 하기 시작하는 거였다. 귀여운 걸 넘어서 ‘저런 건 다 어디서 배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아빠는 따로 저런 영상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엄마는 더더욱 그럴 것이고. 한번 시작했으니 끊을 수도 없고. 그렇게 쿠키 만드는 전 과정을 영상으로 담게 되었다.
쿠키 만들기가 끝나고 나서 어떻게 찍혔나 봤더니 당연하지만 딸아이의 쿠키 만드는 모습 그리고 과정을 설명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게 아닌가. ‘이 좋은걸 나만 볼 순 없지!’ 할아버지 할머니들께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전체 영상을 다 보내드릴 수도 없고. 그래서 이제는 짬밥 좀 찼다고 거들먹거리느라고 회사에서는 하지도 않는 편집을 집에서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1시간 가까이 녹화된 영상을 그저 줄이려고만 했었다(가편집) -> 그런데 어쩐지 좀 허전한 거 같아서 자막도 간단히 넣어봤다(종합편집) -> 그런데 역시나 좀 부족한 거 같아서 음악도 깔아보았다(후반 작업). 그러고 나니 그럴듯한 영상이 완성된 것이었다.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편집된 영상을 보고 좋아하셨다. 그런데 딸아이가 자기가 나온 영상을 보더니 엄청난 관심을 가지며 계속 보여달라고 했다. 그때는 '우리 딸에게도 소위 말하는 관종끼가 있는가 보구나'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며칠 뒤 설날 연휴 아침부터 혼자 방 안에서 한참을 무언가를 하는가 싶더니 보여줄 게 있다며 아빠에게 오는 딸. 그러더니 학교 비대면 수업 때 주로 쓰는 태블릿 PC를 내미는 거다. 뭔가 하고 봤더니 그 안에는 딸아이의 모습이 셀카로 찍힌 영상이 들어 있었다. “엄마 아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란 인사말을 담은 짧은 영상이었는데 가만히 보니 영상에 자막까지 아주 예쁘게 달아놓은 게 아닌가. 엄마 아빠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이벤트 쟁이 같으니라고! 한집에 사는 엄마 아빠에게 영상으로 새해 인사를 전하는 신박함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자막 넣는 건 가르쳐준 적도 없는 데 어떻게 한 거지? 태블릿 PC에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뚝딱뚝딱 편집이며 자막 작업을 해내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것이 MZ세대를 뛰어넘는 알파 세대의 학습능력이란 말인가!
사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최근에는 아이가 자기도 스마트폰에 편집 애플리케이션을 깔아달라고 하는 거다. 주변 언니들은 다 깔아 놓았다며. 엄마는 “너 또 하루 종일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려고 그러는 거냐” 라며 혼내려는 찰나. 아빠 입장에서는 요즘 세상에 게임도 아니고 영상 편집을 해보겠다는데 못하게 할 건 뭐냐며 아내를 설득해 애플리케이션을 깔아주었다. 어차피 미디어가 일상인 시대를 지나 일상이 미디어인 시대가 올 테니까. 아니 벌써 왔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다음 날. 이번에도 자기가 만든 영상이라며 내밀기에 봤더니... 혼자 자기 발 부분을 타이트하게 찍은 영상. 자세히 보니 무용학원에서 배운 스트레칭 동작을 촬영해 자막과 음악까지 넣어놓은 것이었다. 심지어 그럴듯했다. ‘허참.. 이래서 피가 무섭다는 건가? 아니지 아빠는 그다지 편집을 잘하거나 즐겨했던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럼 혹시 요즘 세상엔 그리고 요즘 아이들에겐 이 정도가 당연한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런 걸 ‘뉴 노멀’이라고 하던가??
아이의 꿈을 응원하는 것이 아빠의 역할
이쯤 되니 오랜만에 아빠의 주책 회로가 또 발동되기 시작했다. ‘아이가 이 정도 소질과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적극적으로 밀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 요즘 유튜브 채널 하나 개설하는 것쯤은 일도 아닌데. 딸아이의 이름으로 채널을 개설하는 거야. 주제는 마침 무용을 하니까 그걸로 하면 될 것 같고. 아까와 같은 스트레칭 영상 같은 걸 올리면 일반 사람들도 많이 보겠는데? 어차피 무용이란 게 대중 앞에 노출되는 일인데 이렇게 미리 연습을 해두면 나중에 분명히 도움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며 그 생각을 반에 반도 미처 입으로 꺼내지 않았는데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아내는 이렇게 얘기했다.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할 거야!”
쓸데없는 소리는 못하더라도 쓸데없는 생각은 계속해본다. ‘혹시 나중에 커서 아빠 따라서 PD가 된다고 그러면 어쩌나. 하기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기가 좋다면 하는 거지 뭐. PD가 나쁜 짓도 아니고...’
장차 아이가 어떤 직업을 갖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말릴 생각도 부추길 생각도 없다. 다만 그 직업에 대해서 가능한 정확한 정보를 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실제 그 일을 하기로 했다면 한발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며 묵묵히 도와주려고 한다. 부모의 역할이란 게 딱 거기까지 아닐까?
아빠는 언제나 너의 꿈을 응원할게 무슨 일을 하든 재미나게 해보는 거야!
그런데 말이다. PD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다른 편하고 좋은 직업도 많은데 하필 그런 걸 하겠다고 그래? 매일 밤새고 집에도 못 들어가고 차라리 시험 봐서 공무원을 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