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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뚠뚠 Aug 18. 2021

10년 전의 프러포즈를 꺼내어

이렇게 10년 키웠어요 서른 번째 이야기

2010년 10월 10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어쩐지 라임을 맞추기 위해 10시에 결혼해야 할 것 같았지만 오전 10시도 밤 10시도 결혼하기엔 적절치 않은 시간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10년의 세월이 흘러 2020년, 결혼 10주년이 되었다.     


결혼 10주년이 되는 해 어느 주말 저녁. 친한 형 가족이 우리 집에 놀러를 왔다. 그 형의 첫째 딸과 우리 딸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 가깝게 잘 지내며 노는 사이라 종종 가족끼리 왕래를 하는 편이다. 그날도 우리 집에서 함께 놀다가 저녁을 다 먹고 났을 때쯤 우연히 결혼 프러포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먼저 그 형 커플의 프러포즈 이야기. 예비 신부가 (알고 보면 스파이였던) 동료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는데 멈춰서는 정거장마다 (미리 심어둔) 사람이 한 명씩 꽃을 들고 나타나서 자신에게 건네줬다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엔 예비신랑이 나타나 짜잔! 처음에는 창피했지만 결과적으론 감동적이었단 이야기였다.   

  

겨우 이 정도에 밀릴 수 없었다. 이번엔 우리 커플의 프러포즈 이야기. 우선 며칠 전부터 내가 당시 여자 친구였던 아내에게 친한 개그맨 동생의 공연을 보러 홍대에 가자고 밑밥을 깔아놓았다. 드디어 당일. 미리 빌려둔 홍대 소극장에 도착. 작전대로 관객 하나 없는 극장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난 후엔 난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퇴장. 그때 갑자기 조명이 꺼지고 내가 미리 준비해둔 프러포즈 영상(그동안 데이트 사진을 중심으로 편집한 영상)이 상영되기 시작한다. 영상이 끝나고 나면 불이 켜지고 내가 깜짝 등장. 며칠 동안 싫다는 친구를 끌고 노래방을 다니며 연습한 프러포즈 명곡 이적의 ‘다행이다’를 열창한 후 반지와 꽃다발을 건네며 정식 프러포즈.     


이쯤 되면 유치하게 어느 쪽 프러포즈가 더 감동적이며 좋았는지 티격태격할 차례. 그때 비겁하게도 먼저 형네 커플이 프러포즈를 하며 촬영해 놓은 영상을 내밀었다. 지하철에서 촬영된 생생한 현장 상황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물적 증거를 들이밀어 봐야 물론 내 기준에선 영 성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는 눈. 어디 있더라. 우리 프러포즈도 찍어놓았었는데...     


결혼 후 처음 꺼내보는 프러포즈 영상


집 이곳저곳 구석구석을 뒤져 드디어 10년 전에 만들어 놓은 프러포즈 영상 DVD를 찾아냈다. 결혼할 때 찍은 사진이나 비디오는 결혼하고 나면 한번 꺼내보지도 않는다는 선배들의 말씀을 충실히 이행한 탓에 우리 가족의 경우도 결혼하고 거의 처음으로 꺼내보는 영상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보다 십 년은 젊어 보이는 아내가 소극장에 앉아 있고. 내가 나가고 난 뒤 갑자기 불이 꺼지며 영상이 시작되었다. 놀람은 잠시. 아내는 이내 눈물을 글썽... 아니 펑펑 울기 시작하고 바로 그때 지금보다 백배는 못생겨 보이는 내가 등장해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결국 무릎을 꿇고 반지와 꽃다발을 내밀며 청혼.      


누가 봐도 오글거리는 영상이었다. 다들 자동적으로 솟아오른 닭살에 어쩔 줄 몰라 소리를 지르고 난리 치며 반응하고 있던 그때, 어느샌가 우리 딸아이도 옆에 와서 함께 그 영상을 보고 있었다.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 엄마 아빠의 모습이 신기했나 보다. 끝까지 잠자코 지켜보더니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선 방으로 들어가더니 무엇을 하는지 한참을 뚝딱뚝딱... 5분쯤 지났을까? 방에서 나와서는 엄마 아빠에게 한쪽에 나란히 서보라고 한다.     


10년 만의 리마인드 웨딩


이때부터 시작되는 상상도 못 할 깜짝 이벤트. 바로 딸아이가 준비한, 10년 만에 펼쳐지는 즉석 리마인드 웨딩이었다. 어릴 때는 딴딴 따단~ 결혼행진곡을 입으로 부르며 아빠랑 결혼식 놀이를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좀 컸다고 엄마와 아빠의 결혼식을 올려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딸아이의 입장 멘트에 맞춰 아내와 내가 거실을 가로질러 입장을 한다. 그날만은 사회이기도 하고 주례이기도 한 딸. 언제 준비했는지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간식까지 준비해 차려놓았다. 시키는 대로 간식을 한입씩 먹고 나니 어쩐지 폐백의 한 부분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번에는 성혼 선언을 할 차례.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엄숙하고 경건한 주례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또 한 번 부부가 된 우리. 그리고 다시 주례 선생님의 말씀대로 포옹을 하고 사랑한다는 고백을 주고받고. 이어서 결혼식에서 빠질 수 없는 뽀뽀 타임에 기념촬영까지 야무지게 진행하는 기특한 우리 딸.

      

그런데 놀랍게도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리마인드 웨딩에 이은 리마인드 프러포즈가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갑자기 딸아이가 아내의 눈을 가리더니 몰래 준비한 모형 꽃을 나에게 주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주라는 눈짓. 경건한 마음으로 10년 전 그때를 떠올리며 무릎을 꿇었다. 실로 10년 만에 다시 건네 보는 꽃다발과 10년 만에 다시 해보는 프러포즈였다. 그리고 역시 미리 준비한 장난감 반지를 끼우는 것으로 10년 만의 프러포즈가 완성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기특한 딸 덕분에 결혼식과 프러포즈를 얼떨결에 다시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 딸은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재주도 남다른 걸까. 그 현장을 생생히 지켜보며 촬영하던 형도 보고만 있어도 감동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제 겨우 10년이 흘렀을 뿐이다. 돌이켜보니 그 사이 아내를 맞았고 세상 가장 소중한 딸이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며 세 명의 가족이 오손도손 살고 있다. 물론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이 소중한 가족의 행복이 영원히 이어질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에 최선에 최선을 해서 노력해보려고 한다. 결혼 20주년때는 아니 함께 살아갈 매일매일에 어떤 예상치 못한 이벤트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딸과 아내에게 한마디. "우리 세 식구 앞으로도 잘 살아보자!"   


그러고 보니 결혼이라는 거 꽤 해볼 만한 거 같단 말이야. 안 했으면 어쩔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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