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릴 때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기 마련. 특히 7살 이전 기억들은 가물가물한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에도 초등학교(옛날엔 국민학교) 정도부터는 뜨문뜨문 기억나는 일이 많다. 야구부에 들고 싶어 기웃거리던 기억, 친구들 방방 타는 것 보고 부러워했던 기억, 채변봉투 취합 임무를 맡아 뿌듯했던 기억 등등...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정신없이 그리고 열심히 살았노라 자부한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언제나 갓난아기 같았던 우리 딸이 어느새 훌쩍 커버려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된 게 아닌가. 그 말인즉슨 이제부터는 아빠가 해주는 것들이 나중에 얼추 다 기억날 거라는 얘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열심히 놀아주고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아이의 어린 시절 기억에 관해 아내와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이런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애가 이거 나중에 기억이나 할까?” 결론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지금 일을 정확히는 기억 못 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이 유치원까지는 기억날 거고 또 유치원 때 경험했던 건 초등학교 때까지는 기억날 거고 그리고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순간순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나중까지 부모와의 좋은 기억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라는 것이었다. 물론 꼭 나중에 티 내려고 아이한테 잘해주는 건 아니겠지만.
우리 딸이 초등학생이 되다니
어쨌거나 시간은 흐르고 흘러 역사적인 초등학교 입학식 날. 입학식에 참여하고자 회사에 오전 반차를 내고 학교에 가게 되었다. 아끼는 빨간 코트를 입은 딸아이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학교까지 걸어가다 보니 그전엔 몰랐지만 새삼스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학교까지 가는 길이 왜 그리 멀기만 한지, 여기저기 불법주차해놓은 차들은 왜 그리 많은지, 학교 앞 언덕길은 왜 그리 높기만 한지...
15분쯤 걸어 드디어 학교 도착. '학교'라는 장소를 정말 오랜만에 와보는 터라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가장 놀라웠던 건 예상보다 학교의 모습이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빠가 그때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네모나게 생긴 교실에서 공부도 하고 기다란 복도에서 친구들과 함께 다니기도 하고 넓은 운동장에서 뛰어놀기도 하겠구나 싶었다. 아무튼 선생님과 인사도 나누고 교실 구경도 하고 입학식도 치르고 학교 이곳저곳도 한 바퀴 돌아보고 기념사진도 찍고... 그렇게 드디어 우리 딸은 공식적으로 초등학생이 되었다. 당연히 나는 공식적으로 학부모가 되었고.
아이를 키우면서 이전과는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시기, 예를 들면 백일이랄지 돌이랄지 소위 말하는 변화의 순간들이 있는데 초등학교 입학도 그런 순간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제도권 사회의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 즈음에 부모가 알아두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몇 가지 해보고자 한다.
학부모가 되면서 알아두어야 할 것들
우선 엄마 손이 무척 많이 필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출산 이후에 직장을 다니는 엄마들이 가장 육아 휴직을 많이 쓰는 시기가 초등학교 입학 무렵이라고 하겠는가? 고소영도 참여했다는 녹색어머니회 활동서부터 매일매일 체크해야 하는 수업 준비물, 놓치면 큰일 나는 스쿨버스 시간 등등 엄마가 챙겨야 할 것들이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학교 어플을 통해서 안내사항들은 뭐 그렇게 많이 날아오는지. 안 그래도 아이가 처음 다니는 학교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신경 써야 할 게 많은 상황에서 엄마가 더더욱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소위 말하는 '빵꾸'가 안 날 것만 같았다.
어지간하면 나는 집안일 특히나 육아문제는 아내에게 떠넘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학교 관련 일이라면 어쩐지 자신이 없어 쓱 뒤로 빠지는 경우도 많게 되었다.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단톡방 등을 통해서 오가는 학교나 친구들에 관한 대화를 유심히 보다 보면 디테일한 엄마의 눈을 통해야만 캐치할 수 있는 세세한 정보들과 미묘한 뉘앙스들이 있는 것 같았다. 둔한 아빠들에겐 버거운 영역이라 생각되었다. 엄마가 위대한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이 시기는 특히 갓난아기 때와 같이 엄마의 위대한 활약이 절실한 시기라 생각된다. 적어도 우리 집은 그랬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친구들이 생기는 시기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의 활동반경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긴 시간 생활하게 되니까. 우리 딸아이는 폭넓게 친구를 사귄다기보다 한두 친구한테 마음을 주는 타입인데 유치원 때 친하게 지냈던 단짝 친구가 멀리 이사를 가는 바람에 풀이 죽어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워 나도 딸아이도 학교 가서 좋은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큰 바람이 있었는데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행히 한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하루는 주말에 친구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우리 집에 그 친구를 초대하기로 했다. 주말이면 아빠랑 노는 게 최고라고 했는데 친구가 온다고 하니 펄쩍펄쩍 뛰면서 까지 좋아하는 우리 딸. 약간의 배신감이 느껴졌지만 언제나 을의 입장인 아빠가 뭘 어쩌겠는가?
친구가 집에 오자마자 자기 방으로 조르륵 데려가더니 함께 장난감을 갖고 노는데 뭐하고 노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괜히 말도 걸어보고 친한 척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눈치 없는 주책 아빠가 되기 싫었으므로. 지금도 이럴진대 하물며 나중에 청소년이 되어 이성 친구가 집에 놀러 온다면? 머리가 아찔해진다.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평소보다 밥을 더 정성스럽게 볶고 비엔나소시지를 문어 모양으로 구워 예쁜 접시에 담아내는 정도였다. 딸아이의 첫 번째 초등학생 친구라고 하니 더욱 신경이 쓰였다. 평생 갈지도 모르는 친구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동안 친하게 지내던 그 친구도 아빠의 직장 때문에 멀리 이사를 가버리고 말았다. 불쌍한 우리 딸. 하지만 요즘은 또 새 학년을 맞아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크는 거지 뭐.
초등학생 시기는 또 섭섭하리만치 훌쩍 크는 시기이기도 하다. 몸은 물론이고 정신연령도 한 차원 높아지는 것 같다. 아무래도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폭 넓은 경험을 하다 보니 그런 것이라 생각된다. 선배들의 말을 들어보면 1학년까지만 해도 안 그러던 아이들이 2학년을 지나면서부터는 슬슬 아빠한테 와서 안기고 애교 부리는 경우가 점차 드물어진다고 했다. 고학년이 되면 문 딱 닫고 들어가서 아는 체도 안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다행히 현재 3학년인 우리 딸은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긴 하지만.
이밖에도 초등학생이 되면서 생기는 변화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니는 학원의 개수도 급격히 늘어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의 수준이 아빠도 따라가기 벅찰 만큼 높아지기도 한다. 게다가 돈 들어갈 구석은 왜 그리도 많은지.
비단 초등학교뿐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 사회에 나가고 나서도 매 시기마다 이러한 변화의 순간들은 찾아올 것이다. 언제까지 부모가 쫓아다니면서 챙겨줄 수 없으니 아이 스스로 이러한 변화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워주는 게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자식의 직장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애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으니 하루 쉬겠다고 대신 전하는 부모가 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
끝으로 조금 과장을 보태 내일모레면 중학생이 될 딸아이에게 당부 한마디.
딸아! 괜히 친구들 따라 아빠 멀리하지 말고 우리는 오래도록 친하게 지내자꾸나. 많이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